갯벌에서 봄을 캐는 청산도 주민들

[섬이야기 29]희망을 꿈꾸는 섬, 봄바람 부는 청산도 1

등록 2006.03.01 16:44수정 2006.03.0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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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남쪽 끝에 있는 청산도는 늘 봄을 품고 있는 섬이다. 추운 겨우내 매봉산과 보적산 그리고 대봉산 계곡이 만들어낸 작은 골짜기 다랭이 논밭에, 청산의 여서도 앞 깊은 바다에 봄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철새들이 겨울이면 남쪽으로 날갯짓을 하듯, 갯가에 사는 바다고기들도 찬바람이 불면 물살을 가르며 청산도 아래 바다 깊은 곳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청산은 봄의 섬, 희망의 섬이다.

청산도 포구가 있는 도청리에 들어서면 한두 척의 김 채취선과 돔과 상어를 잡는 걸자망을 손질하는 어부들, 그리고 어민들의 자가용 선외기가 반긴다. 도청리는 고등어파시와 삼치파시로 흥청댔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생선비린내를 맡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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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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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논두렁과 밭두렁의 봄빛

청산도는 어업보다는 농업 비중이 높은 섬이다. 주민들 생업의 80% 이상이 농업에 의존하고 있다. 섬을 아무리 둘러봐도 생선을 말리는 모습을 찾기 어려운 것도 청산도의 특징이다. 오히려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섬마을 곳곳에 푸른 마늘과 보리이다.

논과 밭의 경계들인 논두렁과 밭두렁의 곡선은 그대로 예술이다.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그대로 그려놓은 선들을 어느 예술가가 흉내를 낼 수 있을까. 희망의 색과 자연의 선을 간직한 청산도는 그대로 눈만 감으면 명상이요,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섬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표정이 밝고 친절함은 오래 전 보았던 시골 농부들의 모습이다. 비가 올 것 같아 퇴비더미를 손질하던 당리의 이준진(70) 할머니는 당리 고개에 있는 밭이 전부 <서편제> 영화세트장을 짓는 데 들어갔다면서 인터뷰도 여러 번 했다고 자랑이다.

청산인들은 오랜 세월을 바다보다는 땅에 의존해 살아 왔다. 황금어장을 가졌지만 바다에 눈길을 줄 수 없었다. 깊고 푸른 바다는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의 바다로 자본과 권력에 의해 유린당했고,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다. 겨우 1970년대 후반 주민들은 바다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어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어업기술이 발달하면서 연안 어장을 이용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청산도도 40여 년을 해온 고기잡이(멍텅구리배)는 불법어업으로 더 이상 하기 어렵게 되었다.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욕심'껏 누린 탓일까, 이제는 고기가 잡히질 않는다. 그렇지만 청산인들은 별로 손해 날 것이 없다. 언제 그들이 바다에 의존하며 살아왔던가. 무지랭이처럼 땅에 의존했기 때문에 바다는 그저 덤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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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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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청산도는 섬이지만 양지, 부흥리, 읍리, 신풍리 등 많은 마을이 어장이 없다. 이런 마을은 쌀농사와 보리농사 그리고 마늘농사를 하면서 생활하는 마을들이다. 그래도 어선어업이 활발한 마을로는 면 중심부인 도청리, 도락리이며, 낭장망을 이용해 멸치를 잡는 국화리 정도가 어촌 분위기가 있는 마을이다. 물론 이런 마을들도 마늘과 보리농사를 짓고 있다.


2월의 마지막 일요일, 제주에서 물질하러 왔다 이곳 청산도 사내와 만나 눌러앉은 해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청산도 구경에 나섰다. 어제 오후에 도착을 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좋은 사진이라도 건져볼까 하는 욕심과 물때로 보아 갯일을 하는 사람들이 갯벌에 모습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3월에 방영될 <봄의 왈츠> 촬영이 이루어진 지리해수욕장을 지나 대봉산 남쪽 사면에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은 양지마을을 막 지나려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손을 들고 차를 세웠다.

봄볕에 얼굴이 그을릴세라 수건으로 가리고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소재지로 갈 모양은 아니고, 밭이나 갯가로 갈 폼이다. 이럴 때 무조건 태워드려야 한다. 타는 순간 아주머니는 물어보지도 않는 마을자랑부터 자식자랑, 그리고 아픈 이야기까지 쏟아내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갯일 하는 곳까지 따라가 전혀 경계를 받지 않고 사진도 찍고 인터뷰도 할 수 있다.

“빼빼마른 곳에서 먹고 가르치고 살았으니 원통하제.”
“도시로 못나간 것이 원통해.”
“나가서 (아저씨는) 경비라도 하고 품이라도 팔았으며….”
“여기서 했던 노력을 하면 먹고 살았을 것이여.”

세 딸고 두 아들을 둔 아주머니는 환갑을 앞두고 있었다. 딸들은 여상고, 아들들 대학까지 쌀농사와 마늘농사를 지어서 보냈다. 오던 길에 권덕리에서 만난 칠순의 할아버지는 딸 셋에 아들 넷을 두었다. 이 할아버지도 아들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학을 보내고 유학까지 보냈고, 딸들은 겨우 중고등학교만 보냈다.

모든 아들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모에게 급해서 그런다면 손 벌리는 자식은 아들들이고, 용돈 하라며 돈 보내는 자식들은 딸이라며 딸자랑을 해댄다. 권덕리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청산은 마을 어귀마다 비석과 비문들이 많고, 일찍부터 개화해 학문에 관심이 많은 섬’이라는 일러준다. 대체나 청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논리가 정연하고 언변도 좋다. 그래서 ‘청산에서 글자랑 하지마라’고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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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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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갯벌에서 봄을 캔다

양지마을에 사는 아주머니는 일행들과 함께 용달차를 타고 도락리 갯가에 파래 등을 뜯기 위해 가기로 했었다. 약속시간보다 5분 늦게 마을 어귀에 도착해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떠났고, 혼자서 지나는 차를 탈 요량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지마을에서 도락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고개를 넘어 읍리를 지나고 다시 서편제 촬영장이었던 당리를 거쳐 자동차로도 약 10분을 가야 하는 녹록치 않는 거리이다. 당리는 1953년까지 면사무소 있었던 곳으로 과거 마을중심지였다.

당리를 넘어서자 한눈에 도락리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길을 잡는다. 도락리는 청산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다. <서편제>의 유명한 황톳길에서 내려다보는 도락리는 인근에 청산면 소재지 도청리, 서편제의 촬영지 당리가 인근에 있다. 과거에는 외지 마을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을어장에 들어와 해초를 뜯는 것을 강하게 막았다.

심지어 마을주민들도 개(바다 혹은 어장)를 열지 않는 시기(마을에서 회의를 통해 채취시기를 결정한다)에 채취를 하다 걸리면 정해진 벌금을 내거나 벌칙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마을에서는 다음 해 어장이용권리를 박탈하거나 심지어는 마을성원을 박탈하기도 했다.

마늘밭과 보리밭 사이로 포장된 시멘트 길을 지나 도락리 갯가에 이르렀다. 먼저 출발한 일행들이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물이 쓰기만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반찬거리로 해초를 뜯거나 석화를 캐기 위해서 다른 마을의 갯가를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곳 마을어장 권리를 가지고 있는 도락리 사람들도 지나치지 않으면 크게 괘념치 않는 분위기이다. 바닷가에 살지 않는 탓에 물때를 정확히 알지 못해 미리 와서 물이 빠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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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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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짚더미를 바람막이 삼아 봄볕을 즐기던 할머니들 중 급한 몇 사람이 갯가로 내려선다. 남도의 갯벌처럼 석화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돌에 듬성듬성 붙은 석화를 녹슨 낫으로 쪼아 알을 꺼내고 있다. 석화를 까기 위해서는 조새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돌에 붙은 석화를 까기 위해 낫 끝으로 돌을 쪼는 것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와서 작업을 해본 솜씨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근 읍리와 당리 등 20여명의 섬사람들이 도락리 갯가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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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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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늘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봄기운을 맞고자 여행을 떠난다. 내가 2월의 마지막 주말에 청산도를 가고 싶어 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완도에서 45분이면 닿는 멀지 않는 섬이지만 심리적 거리감은 제주도만큼이다. 뭍사람들에게 이렇게 거리감을 준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청산이라는 이름 탓일까, 아니면 아련히 남도의 황톳길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서편제> 영화 탓일까.

전라도 남도 끝에 있는 섬 청산도,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해주던 섬이다. 겨우내 봄기운을 고이 간직하다 봄바람과 파도에 봄의 씨앗을 실어 뭍으로 보낸다. 그래서 청산도는 희망의 섬이고, 미래의 섬이다. 늘 육지에 그리움을 전해주는 섬 청산도, 이제 그 꿈과 희망이 그들에게 필요하다. 청산도가 그대로 ‘청산’이 되기 위해서는 그 곳 사람들이 간직한 단아하고 순박한 아름다움미 자원이 되고 ‘사회적 가치’로 인정될 때 가능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청산도 이야기를 5회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1. 봄바람 부는 청산도
2. 오래된 미래, 청산도 사람들의 삶
3. 서편제에서 ‘봄의 왈츠’까지
4. 청산도의 사는 제주 해녀이야기
5. 청산도 포구의 사회사
(상황에 따라 연재횟수는 조정될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청산도 이야기를 5회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1. 봄바람 부는 청산도
2. 오래된 미래, 청산도 사람들의 삶
3. 서편제에서 ‘봄의 왈츠’까지
4. 청산도의 사는 제주 해녀이야기
5. 청산도 포구의 사회사
(상황에 따라 연재횟수는 조정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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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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