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바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바다에서 부치는 편지 12] 동백꽃에 얽힌 이야기

등록 2006.03.04 14:22수정 2006.03.0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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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마지막 주말 남쪽 끝 섬 청산에 갇혔습니다. 요즘 세상에 유배를 당한 것도 아니고 누가 나가지 말라고 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의적으로 그곳에 남으려 했던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김준
날 잡은 것은 봄바람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봄이 오는 길목에는 영등할미가 내려와 미역씨와 전복씨를 뿌려주는데 꼭 바람이 분다고 합니다. 바람이 불기 전에 비가 온다면 영락없이 영등할미가 내려왔다 가는 것일 겁니다. 지난 주말이 그랬습니다. 청산도를 들어가는데 비가 한두 방울 내리더니 저녁에는 제법 빗방울을 뿌려댑니다.


다음날 비온 뒤라 보리는 더욱 푸르고 하늘은 제 색깔을 드러냈고 바다는 푸르렀습니다. 얼마만에 보는 청명한 날씨인가 싶어 '미친○ 널뛰듯' 섬을 싸돌아다니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오후 막배로 나가려고 도청리 부둣가에 나갔는데 '육지 것들' 몇 사람만 기웃거릴 뿐 여객선표를 파는 곳은 문이 잠겨있고 배는 움직일 기척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은 벌써 배가 뜨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나를 포함해 육지 것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두를 서성이길 30여 분 그리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폭풍주의보로 배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미련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에 뜻을 따르고 차분하게 섬 구경이나 하며 사람을 만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김준
어제 눈여겨 두었던 초등학교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곳에는 지름 20cm 이상 되는 동백나무가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동백도 아름답지만, 외진 곳에 의연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몇 그루의 동백을 보는 것도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동백의 밑둥이 성인의 굵은 팔뚝 크기로 자라려면 몇 십 년은 지나야 한다고 합니다.

울릉도에 전해오는 동백꽃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금슬이 좋은 어부 부부가 살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남편이 볼일이 있어서 육지로 가게 되었습니다.

"여보 내 잠시 뭍에 나갔다 오리다."
"예 서방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김준
하루 이틀 지나가고 남편이 돌아온다던 날이 지났지만 남편을 실은 배는 오질 않았습니다. 해가 바뀌고 기다림에 지친 어부 아내는 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리에 눕게 되었답니다. 이웃 사람들이 정성껏 간병을 했지만 끝내 어부의 아내는 안타까운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남편이 돌아오는 배가 보이는 곳에 묻어 주세요."


마을 사람들도 어부 아내의 넋을 위로하며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습니다. 어부의 집 앞 후박나무에는 수많은 흑비둘기 떼가 날아와 울어댔습니다. 그 소리는 꼭 이렇게 들렸습니다.

"열흘만 더 기다리지. 넉넉잡아 온다. 온다. 남편이 온다."
"죽은 사람 불쌍해라. 원수야. 원수야. 열흘만 더 일찍 오지 넉넉잡아서."

신기하게도 그날 저녁,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내의 죽음을 듣고는 무덤으로 달려가 목 놓아 울었다.

"왜 죽었나. 열흘만 참았으면 백년해로 하는 것을 원수로다, 원수로다."
"저 바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몸이야 갈지라도 몸이야 갈지라도 넋이야 두고 가소. 불쌍하고 가련하지."

어부는 아내 생각에 매일같이 무덤에 와서는 한 번씩 슬프게 울고는 돌아갔는데 하루는 돌아서려니 아내 무덤 위에 전에 보지 못하던 조그마한 나무가 나 있고 그 나뭇가지에는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답니다. 눈이 하얗게 내리는 겨울에도 얼지 않고 피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꽃이 지금 울릉도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동백꽃'이라고 한다.

김준
약간씩 다른 판본의 이야기들이 전하기도 합니다. '어부의 아내는 남편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남편을 기다리다 죽었다. 늦게 돌아온 남편이 너무 슬퍼 피를 토하며 울었다. 그곳에서 피어난 붉은 꽃이 동백꽃이다'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이웃나라 일본에도 전합니다. 일본 아오모리현 쓰가루에 있는 동백산의 전설이다. 옛날 남국의 청년 한 사람이 두메산골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마을의 어느 소녀 하나를 알게 되었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장래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사랑에는 늘 사랑의 여신의 질투가 있기 마련이지요. 이 청년이 그 고을을 멀리 떠나야 했답니다. 떠나기 전날 밤 동산의 달빛 아래에서,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의 고향은 남쪽 나라 따뜻한 곳이라고 알고 있는데, 다음에 오실 때 동백나무 열매를 꼭 갖다 주세요. 그 나무의 열매 기름으로 머리를 예쁘게 치장하여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김준
그러나 남쪽으로 떠난 청년은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일 년이 다 되어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헤어지던 날처럼 달빛이 동산을 비추던 봄날 소녀는 청년을 그리며 헤매다 숨을 거두고 말았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가 죽은 줄도 모르고 그리움을 안고 돌아온 청년은 소녀의 죽음을 알고 무덤 앞으로 달려가 땅을 치고 통곡을 했다.

청년은 가지고 온 동백나무 열매를 무덤 주위에 뿌리고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그 이후 청년에 의해서 뿌려진 동백나무 열매는 싹이 트고 줄기가 나서 마침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산 전체가 동백꽃으로 불타는 듯이 빨갛게 덮였다. 죽은 소녀의 넋이 한이 되어 그 한이라도 푸는 듯이 봄이면 동백꽃으로 동산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었다.

김준
김준
여수 오동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답니다. '도둑이 들어와 여인을 욕보이려 하자 절개를 지키려는 여인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답니다. 그 후 절벽의 양지바른 곳에 핏빛 꽃이 피어났는데 그것이 여수의 동백나무라고 합니다.'

어떤 마을은 마을숲(당산숲)으로 동백나무를 심은 경우도 있습니다. 동백나무 숲에서 '후드득'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전염병귀신이 놀라서 도망가 마을에 전염병이 생기지 않았다는 마을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백나무 가지로 망치를 만들어 마루에 걸어 놓으면 '화'를 막는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또 동백은 다산의 상징으로 남부지방에서는 결혼식의 초래청에 동백나무를 올려 다산을 기원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제주에서는 동백꽃이 길(吉)한 기운보다는 흉(凶)한 기운이 있다고 해서 동백나무를 선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쪽 동백꽃을 찾고 있습니다. 그 꽃에 담긴 사연들도 함께 새기면서 여행한다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동백은 절개가 있는 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동백 이야기에는 언제나 '여인', '절개'와 함께 '죽음'이 코드로 등장합니다. 반대로 봄에 피는 동백은 겨우내 움츠린 사람들에게 봄과 '희망'으로 다가서기도 합니다.

덧붙이는 글 | 동백꽃에 얽힌 이야기는 필자가 들었던 이야기와 인터넷을 통해 검색한 자료 등을 모아서 정리한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동백꽃에 얽힌 이야기는 필자가 들었던 이야기와 인터넷을 통해 검색한 자료 등을 모아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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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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