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조선·청에 퇴짜 맞고 '패륜아'로

일본이 유신외교에서 함포외교로 전환한 사연

등록 2006.03.02 08:53수정 2006.03.02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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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는 3·1 만세운동으로, 또 고된 무장투쟁으로 저항하여 결국엔 주권을 되찾았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 우리는 나라를 상실한 원인을 분석하고 우리 자신을 반성하였다.

우리는 조선 왕조 붕괴의 원인을 봉건체제의 모순과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외압에서 찾고 있다. 일본은 그러한 약점을 뚫고 조선 점령에 성공하여 36년간 우리를 식민 통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침략 전야(前夜)의 일본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일본은 어떠한 배경 하에서 본격적인 조선침략을 결행하게 된 것일까?

메이지 유신(1868년) 직후의 일본 외교(유신외교)는 새로운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들은 자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임으로써 일본을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로 만들려 하였다.

메이지 유신 직후엔 유신외교

a 유신외교 및 탈아외교 당시의 일본 메이지 국왕

유신외교 및 탈아외교 당시의 일본 메이지 국왕 ⓒ 일본 궁내청 소장자료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일본이 '황제국가'임을 온 천하에 널리 알린다는 것이었다. 일단 이웃나라 조선을 굴복시켜 일본의 위상을 황제국가로 드높이자는 것이 그들의 발상이었다. 황제국가가 되어 훗날 언젠가는 중국을 정복하고 나아가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려는 것이 당시 일본 지도층의 야심만만한 '포부'였다. 이것이 당시 메이지 국왕(소위 '천황')을 앞세운 일본 지도부의 장기 계획이었다.

일본이 이처럼 자국의 위상에 무척이나 신경을 쓴 이유는,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이 동아시아의 변방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전근대 시대(전통시대)에 일본은 늘 한반도의 견제 때문에 대륙과의 교류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대륙의 선진문화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들은 자연히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 에도시대(江戶時代)를 거치면서, 일본은 경제·군사·문화적으로 고도의 발전을 거듭했다. 반면에 폐관정책(쇄국정책)을 고수한 조선과 청나라는 그 발전 속도가 상대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눈부신 발전상과 조선 및 청나라의 상대적 낙후성을 간파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나선다. 임진왜란 이후 근 300년 만에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한 일본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바로 '일본은 황제국가'라는 것이다.

메이지 정부의 캐치프레이즈는 '일본은 황제국가'


일본이 '황제국가'임을 인정받기 위해서 일본이 첫째 타깃으로 삼은 것은 바로 조선이었다. 1869년 일본정부는 국교회복을 요청하는 국서(國書)를 대마도 도주(島主)를 통해 조선에 보냈다. 이들이 국교회복을 요청한 것은, 꼭 국교회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빌미로 조선을 굴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국서는 종래의 국서와 다른 형식을 갖고 있었다. 종전에 일본이 조선에 보낸 국서에는 일본 통치권자의 칭호가 대군전하(大君殿下)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 이전 시기만 해도, 막부(幕府, 실권을 행사하던 군부)의 수장인 쇼군(將軍)이 일본을 외교적으로 대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869년 일본이 조선에 보낸 국서에는 대군전하 대신 황상(皇上)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러니까 국왕이 본격적으로 외교 무대에 나서면서, '황제'를 가리키는 '황상'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일본, "대군 대신 황상으로 인정해 달라"

그럼, 일본정부는 어떤 명분을 갖고 그렇게 했던 것일까? 1999년 도쿄대학에서 발행한 <사학잡지> 제108편 제1호에 실린 "근대 일·조 관계와 외교예양 - 천황과 조선국왕의 교제에 관한 검토로부터"라는 논문은 당시 일본정부의 입장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쇼군이 조선국왕과 대등하게 상대하였다. 이제 천황이 친정(親政)하게 되었다. 쇼균은 천황의 신하(이므로, 조선국왕은 천황의 신하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대등한 국교가 있을 수 없다."

일본은 '조선국왕은 쇼군과 동격인 동시에 천황의 하위에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조선더러 자국을 황제국가로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국 국왕을 황제로 인정하라는 일본의 주장 속에는 '조선은 일본의 신하'라는 논리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정부가 일본 국왕을 '천황'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조선 국왕은 일본 국왕의 신하?

일본의 의도가 뻔히 보이므로, 조선은 "발칙하다"하여 국서를 거부하였다. 조선정부는 국서를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일본의 요구가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 하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조선이 일본의 변화된 국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튼 당시의 조선정부로서는 일본의 요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이나 프랑스의 함포외교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은 흥선대원군이, 국서 한 장을 달랑 내밀면서 "우리를 황제국가로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일본정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일본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

아무튼 조선의 국서 거부로 인해 일본정부의 첫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에게 일본이 황제국가임을 인식시켜 조선의 굴복을 받아내겠다'는 당초 일본의 계획은 이로써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 내에서 1871년부터 정한론(征韓論, 한국정벌 주장)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조선에게 '황제국가' 소리를 듣지 못한 일본은 이번에는 청나라를 타깃으로 삼았다. 청나라에게서 직접 '황제국가' 인정을 받아 내자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1870년 국왕의 대외적 칭호를 대천황(大天皇)으로 개칭한 일본은, 1871년 청나라와 청일수호조규(양국 간 기본조약)를 체결할 당시 조약문에 어떻게든 '천황'을 삽입하려 했다.

그러나 청나라 역시 일본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았다. 청나라가 거절한 이유는 과거에 그러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401년 및 1403년에 명나라와 일본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가 체결한 조약에는 일본측 통치권자인 쇼군이 '국왕'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청나라가 일본측 요구를 거절함에 따라, 청일수호조규는 결국 양국 군주의 칭호가 생략된 채로 체결되었다. 그러니까 조약 체결권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표기는 없이 양국의 국가 명칭만 표기된 것이다.

청나라도 일본에 '퇴짜'

이렇게 해서 조선과 청나라 모두에게 '퇴짜'를 맞은 일본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외교방식으로는 일본이 도저히 황제국가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조선과 청나라를 굴복시키려면, 영국·미국·프랑스 같은 서양열강처럼 외교적 시비를 걸고 함포 사격으로 위협을 가하는 게 '최상책'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내에서는 1871년부터 '유신외교'가 힘을 잃고 '탈아외교'(脫亞外交)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탈아외교란 문자 그대로 '아시아를 벗어난 외교'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아시아의 방식을 버리고 서양의 방식으로 외교를 하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주로 함포사격 등의 방법이 동원되었으므로 '함포외교'라고도 불린다.

동아시아의 중심국가가 되려면 서양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방식을 모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그때부터 동아시아의 '패륜아'로 전락하고 만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을 트집 잡아 외교적 시비를 걸고 함포사격을 가하는 '패륜아 일본'의 이미지가 그때부터 형성된 것이다.

패륜아 되지 않고는 꿈을 이룰 수 없는 일본?

그러한 일본의 탈아외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은 탈아외교를 바탕으로 1874년 대만침략-1875년 운요호사건-1894년 청일전쟁-1904년 러일전쟁을 거쳐 조선을 강점하고 나아가 중국침략을 개시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이 이른 바 '깡패외교'라 할 수 있는 탈아외교를 통해 한국·중국을 침략한 배경에는 1870년대 초반의 '아픈 시련'이 있다. '정상적인 외교를 통해서는 도저히 동아시아의 중심국가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이 일본을 그 같은 '패륜아'로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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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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