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라스 평원에서 고선지 장군을 상상하다

[중앙아시아 여행기 29] 탈라스 3

등록 2006.03.10 10:48수정 2006.03.1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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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에서의 식사. ⓒ 김준희

안티카는 라마단 금식 기간이기 때문에 점심식사를 하지 않는단다. 할 수 없이 나는 에르킨과 함께 탈라스 시내의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바람을 쐬면서 에르킨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이 근처에 평원이 있어?"
"글세… 아마 이 근처에는 없을걸. 왜?"
"어제 내가 말했던 그 전투가 이 근처 평원에서 있었거든."
"거기 가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응."
"내 사무실에 올라가서 찾아보자."

우리는 함께 에르킨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에르킨이 혼자 사용하는 사무실은 크지는 않지만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책상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고 그 주위에는 책장과 테이블, 몇 개의 의자가 있다. 그리고 사무실의 벽에는 탈라스 지역 지도가 붙어 있다. 그 지도를 보니까 탈라스시 일대는 전부 산악지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에르킨이 말한다.

"거봐. 이 부근에는 없잖아."
"평원 비슷한 것도 없어?"
"잠시만. 좀 알아볼게"

에르킨은 안티카와 뭔가 대화를 하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두 통했다. 잠시 후 전화를 끊으면서 말한다.

"그 전투가 있었던 곳은 이 부근이 아니라 여기서 서쪽으로 좀 더 떨어진 곳이라는데."
"누구한테 전화한 거야?"
"탈라스 역사 선생님이랑 민박집 사장님한테."

에르킨은 벽에 붙은 지도를 보면서 한 마을을 가리켰다. 탈라스에서 서북쪽으로 좀 떨어진 그 마을의 주변 지역은 평지와 초원지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서 얼마나 떨어진 곳이야?"
"한 70km 정도?"

70km라. 그렇다면 왕복으로만 족히 2시간 넘게 걸린다는 얘기다. 어떻게 한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다시 에르킨과 안티카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안티카는 흔쾌히 응했고 그곳까지 자신의 차로 태워다 주기로 했다. 책상에 앉아있던 에르킨은 노트북을 덮었다.

"나도 같이 가자. 특별히 바쁜 일도 없으니까."

이리하여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탈라스시에서 서북쪽으로 70km 떨어진 마을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에르킨의 말이 맞았다. 탈라스시를 빠져나오자 양옆으로는 완만한 평지가 나타났지만, 수만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맞붙기는 힘든 곳이다. 평지는 넓지 않았고 그 주위는 단단한 땅에 울퉁불퉁한 지형이다. 그동안 어떤 지각변동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1300년 전에도 평원이라고는 봐줄 수 없는 그런 지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가고 있는 그 지역은 어떨까. 지도에서 온통 초원지형으로 표시해둔 그 마을 부근이 1300년 전에 고선지 장군이 최후의 전투를 벌인 곳일까. 당시에 고선지 장군은 서역을 총괄하는 안서도호부 사진절도사의 위치에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서역에서 가장 끗발 있는 중국인이었던 셈이다. 그랬던 그가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고 비운의 죽음을 당한 이후로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고선지 장군을 주목했던 것은 오히려 영국의 학자였다. '중앙아시아 고고학의 태두'라 불리는 영국의 오렐 스타인은 고선지 장군의 업적에 대해서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이나 나폴레옹보다,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를 돌파한 고선지가 더 위대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창밖으로는 커다란 저수지가 보인다. '카라보라'라는 이름의 저수지에는 큰 댐이 있고 댐 한쪽에는 레닌의 얼굴을 조각해놓았다.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시내에 있던 레닌의 동상은 모두 철거했어도, 댐에 박혀있는 레닌의 얼굴은 어쩌지 못하나 보다. 저수지를 지나자 키르기스스탄의 산악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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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보라 저수지. 댐 한쪽에 레닌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 김준희

1시간쯤 달리자 그 마을에 도착했다. 에르킨은 차를 세우고 안티카와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 뭔가를 한참 물어보더니 마을 안쪽의 한 파란 대문 앞에 차를 세웠다.

"이곳에 사는 할아버지가 그 전투에 관한 사실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던데."

75세된 '아랄바이 아마나'라는 이름의 할아버지는 마당으로 나와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대학에서 2개의 학위를 받고 역사에 조예가 깊다는 할아버지는 7명의 자식이 있고 20명이 넘는 손자가 있다고 한다. 75세지만 아직도 직접 밭에서 일을 하신다고. 난 한국에서 온 여행자라고 소개를 했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서 잠시 대화를 하고 나서 할아버지는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는 서가에 책이 잔뜩 꽂혀있고 어느새 상에는 푸짐한 음식이 차려져 있다. 할아버지는 손님을 맞는 전통이라면서 나를 상석에 앉게 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음식을 권하며 말한다.

"자네가 많이 먹으면 많이 얘기해줄 테고, 적게 먹으면 적게 얘기해줄 거야."

안 그래도 배가 고파오던 김에 잘된 일이다. 라마단 금식기간을 보내고 있는 안티카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그냥 앉아 있다. 배고픔을 참는 것만큼이나 남이 먹는 것을 보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도 고역이리라. 난 상에 차려진 빵, 과일을 먹고 차이를 마시면서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아버지의 얘기를 통역해주는 에르킨의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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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아랄바이 아마나 할아버지와 함께 ⓒ 김준희

탈라스 전투는 서로 영향력을 넓혀가던 중국과 아랍세력이 이곳에서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어서 일어난 전투라고 한다. 당시 중국의 군대는 7만~10만명 정도이고 아랍세력의 군사력도 그 정도였을 거라고. 전투력과 병력이 비슷했기 때문에 하루 만에 결판나지 못하고 며칠간 계속된 전투는, 이 부근 현지인들이 아랍군을 지원하면서 단숨에 전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왜 이 지역의 현지인들이 아랍세력을 편들었죠?"
"같은 유목민이니까. 같은 유목의 전통을 지닌 아랍인 편을 들었던 거지."

카자흐스탄의 도시 '타라즈'에 있는 박물관에 가면 이 전투에 관한 기록이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타라즈는 구소련 시대에는 '잠불'이라는 이름이었지만 독립을 하면서 도시명을 바꾼 곳이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불교유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이 예전에 중국 영향권에 있었다는 증거라고도 한다.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그 전투가 있었던 곳이 어디인가요?"
"지금 이 일대야. 여기는 예전에 전부 평원이었어. 구소련 시대에 운하를 파고 나무를 심으면서 지형이 바뀌었지."

할아버지는 그 근거로 이 마을의 이름을 들었다. 이 마을이름은 영어의 'flat'에 해당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할아버지에게 푸짐한 대접을 받고 다시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할아버지는 이 마을까지 온 한국인은 내가 처음이라면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는 마을 밖으로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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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 전투가 있었다는 평원. ⓒ 김준희

예전에 평원이었을 장소는 이제 큰 숲과 운하와 돌무더기, 마을로 바뀌어 있다. 지각변동이 없더라도 인간은 평원이었던 곳을 이렇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평원의 흔적만은 남아있다. 돌무더기 너머로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고 멀리 수풀 사이로 지평선이 보이기도 한다.

난 서쪽을 바라보았다. 당시에 고선지 장군도 이 부근 어디에선가 서쪽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는 수풀 대신에 진을 치고 있는 수만의 아랍군이 있었을 것이다. 고선지 장군은 그 군사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파죽지세로 서역을 장악했던 그였기에 탈라스 회전에도 자신만만하게 임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천려일실이랄까. 천하의 고선지 장군도 이곳의 현지인들이 아랍군을 지원할 거라는 사실만큼은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상상할 수 있겠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에르킨이 말했다.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서쪽에는 아랍 연합군이 자리잡고 있고, 동쪽으로는 고선지 장군 휘하 수만의 군사들이 정열해 있다. 곧 전투가 시작된다. 평원에서 진을 치고 맞붙는 회전이 늘 그렇듯이, 선두에 선 것은 기병대였을 것이다. 바람처럼 빨리 달린다는 서역의 한혈마를 탄 당나라의 기병대는 아랍연합군의 기병과 맞붙고 곧 당의 보병도 밀려와서 전투에 합세한다.

대등한 전투력과 병력 때문에 전투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5일간 계속된다. 그리고 그 전투 속에서 고선지 장군도 당나라 군사들도, 그리고 아랍 연합군도 지쳐갔을 것이다. 바로 그때 이곳의 현지인들이 아랍 연합군을 지원하면서 승부는 판가름났다. 생애를 통틀어 가장 비참한 패배를 당한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로 퇴각하지만 몇 년 후에 비운의 죽음을 맞게 된다.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 장군이 승리했다면 이후의 중앙아시아 역사는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난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멋대로 한번 상상해본다. 만일 그랬다면 고선지 장군은 이후에도 승승장구 했을 테고, 중앙아시아는 이슬람 문화가 아닌 중국풍의 문화가 우세했을 것이다. 그리고 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푸른색 돔이 아닌 기와지붕의 유적을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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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 평원. 키르기즈스탄 친구 에르킨. ⓒ 김준희

마을의 입구에서 벌판을 바라보던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탈라스 시내로 향했다. 먼 거리까지 날 안내해준 에르킨, 안티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탈라스에서 하루를 더 쉬고 나서 비쉬켁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다음 목적지는 이식쿨 호수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즈스탄을 배낭여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2005년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즈스탄을 배낭여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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