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90회

등록 2006.03.17 08:25수정 2006.03.17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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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네놈을 단칼에 죽이지 않는지 아나?”

나무를 깎아 만들면 저리될까? 얼굴선이 너무나 매끄러운 사십대 초반의 사내였다. 갈색으로 빛나는 눈과 붉은 입술은 미녀의 그것을 닮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기도는 무심(無心) 그것이었다. 아무런 색깔이 없는 무심함.


“그거야 네 마음이지, 내가 왜 상관해야지?”

백결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의 목에는 폭이 넓고 칼등에 아홉 개의 고리가 달려있는 구환도(九環刀)가 닿아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비웃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살기를 체념한 것인지도 몰랐다. 상대는 강했다. 십 초가 지나지 않아 이런 낭패를 당한 것이다.

물론 아직 회복하지 못한 부상으로 진기의 운용이 자유롭지 않았고, 움직임도 현저하게 둔화된 탓이 컸지만 정상적인 몸으로도 저 사내를 당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저 사내의 말대로 자신을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살려달라고 빌어봐..... 혹시 내가 마음이 변해서 살려줄지 아나?”

“미친 놈....! 나는 사실 진정한 무인이 아니야. 될 수도 없는 사람이지. 허나 목숨가지고 구걸할 마음은 없어. 헌데 너는 누구지? 천동 인물인가?”


“질문은 내가 한다. 너는 대답만 하면 되는 거야.”

구환도의 끝이 백결의 목과 어깨 사이를 살짝 파고들었다. 그것은 백결이 말을 잘못하면 느긋하게 구환도를 몸에 박아 넣겠다는 일종의 시위였다. 백결의 한 쪽 얼굴이 일그러졌다. 날카로운 구환도의 끝은 이미 피부를 헤집고 근육 속으로 파고들었다.


“푸--훗---!”

백결은 그 와중에서도 비웃듯 실소를 터트렸다.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자신의 목숨은 상대가 가지고 있었다. 허나 그가 말했듯이 후일을 기약한다고 이 자에게 목숨을 구걸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자네는 생각보다 어리석은 편이군. 경험이란 것은 그래서 필요하다네.”

백결이 보기에 상대는 무공은 고강했지만 경험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상대는 지금까지 오직 무공을 익히기 위해 경험을 축적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네 말대로 경험이 적을지는 모르지. 어리석을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을 위해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버려. 네가 내 수중에 있다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쉬워질 터이지만 그렇다고 네 놈의 비아냥을 그냥 듣고만 있고 싶지는 않거든.”

사내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 말은 사실로 느껴졌다. 사내는 그런 성격인 것 같았다.

“빌어먹을.... 죽을 때가 된 것은 맞는 것 같군. 별로 친해지기 싫은 작자를 만나다니 말이야......”

조심스럽게 살펴본다고 마음먹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일을 급하게 서두른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우우전으로 은밀하게 잠입했지만 장철궁 사형이 이미 보이지를 않았고, 운령이 머무는 곳을 기웃거리다 이 자에게 발각된 것이다. 더구나 예상과는 달리 이 자는 대사형에 버금갈 가공할 무위를 가지고 있었고 도망칠 여유조차 찾지 못하고 쉽게 제압당했던 것이다.

“자.... 이제 몇 가지 물어보지.”

사내는 말투와는 달리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으로 백결의 얼굴 쪽으로 다가들었다.

“섭장천은 어디 있지? 장철궁은 만나보았나?”

이 자는 확실히 경험이 별로 없는 자였다. 그 질문에 백결은 오히려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천마곡이 이미 방백린에게 접수되었음은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짐작이 되었다. 궁금한 것은 장철궁 사형의 생사여부였다. 아직 사형은 살아 있다!

“만나보았으면 내가 이리저리 헤메고 다녔을까? 자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는군.”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군.”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럼 담천의란 자는 어디에 있지? 같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아직 듣지 못했나? 연동에서 헤어졌다네. 유항이 청했다네. 큭---!”

백결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이 터졌다. 구환도의 끝이 조금 더 백결의 몸에 파고들었다. 스며 나오던 피가 주륵 흘렀다.

“대답을 조금 고분고분하지 않겠나? 네 대답을 듣고 있자면 이 구환도를 네 몸속에 콱 박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기거든.”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확실히 조심해야 할 상대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 도저히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프흐흐... 꽤나 죽이고 싶은..모양이군.”

백결이 고통을 참으며 말을 한 순간이었다. 전각 옆에서 인기척이 나며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자네가 천동의 우상(右相)이라는 아이인 모양이군.”

“노야.....!”

백결의 입에서 신음처럼 한 마디가 나왔다.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인물은 섭장천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 나왔는데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이라고 할만한 얼굴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역시.... 네 놈하고 노닥거린 것은 시간낭비가 아니었군. 그토록 찾고 싶었던 분을 이렇게 간단히 뵐 수 있으니 말이야.”

헌데 그 순간이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가오던 섭장천이 갑작스럽게 발검(拔劍)을 하며 사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츄아악----!

검 끝에서 불꽃이 터지며 사내의 전신을 덮어가고 있었다. 사실 무림의 선배로서 후배를 상대로 먼저 손을 쓰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더구나 기습적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아주 비겁한 행위였다. 게다가 천하제일검의 명성을 가졌던 섭장천이 먼저 공격한다는 것은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허나 섭장천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나타나는 순간 저 자는 이미 이용가치가 사라진 백결을 죽여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헙.....!”

사내가 급히 몸을 비틀며 좌측으로 미끄러지듯 빠르게 움직였다. 그만큼 섭장천의 공격은 치명적이었고 기습적이었다. 그 순간에도 사내는 구환도를 쾌속하게 놀리며 쏘아오는 섭장천의 불꽃같은 검영을 튕겨냈다.

짜르르---르릉----

구환도에 달려있는 아홉 개의 고리에서 고막을 거슬리는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사람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음향이어서 혼을 빼놓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섭장천의 공격은 재차 이어져, 선수를 빼앗긴 사내는 수비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빠바바박----!

검과 도가 허공에서 마주치는 순간에 오히려 쇳소리가 나지 않고 오히려 바삭 마른 장작이 뽀개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것은 이미 검과 도에 막강한 진력이 담겨있어 검기와 도기가 마주치고 있다는 의미였다. 대단한 고수였다. 선기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천하제일검의 명성을 안고 있는 섭장천의 검을 한 치의 허술함도 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섭장천의 얼굴에 미세하나마 감탄의 기색이 흘렀다. 허나 그와 동시에 섭장천은 몸을 허공에 떠올리더니 재차 가공할 검기를 사방에 뿌려냈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하늘에서 유성우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것 같았다. 사내는 급히 몸을 옆으로 회전시키며 구환도를 빠르게 흔들었다. 그의 구환도에서 아홉 가지의 영롱한 기류가 뿜어지며 우박처럼 쏟아지는 유성우를 마주쳐갔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갑작스럽게 섭장천이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면서 전각 쪽으로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도망가는 것이다. 천하의 섭장천이 도망간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사내는 최대한 수비에 치중하다가 갑자기 공격이 멈춰지자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띠웠다.

“좀 더 놀아주고는 싶지만 귀찮은 애들이 올 것 같구먼..... 다음에 보세.”

사내는 섭장천을 뒤쫓으려다 문득 백결이 있는 곳을 보았다. 허나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상황은 분명했다. 섭장천이 나타나 단 삼초를 기습적으로 자신에게 퍼부었다. 그 순간을 이용해 누군가가 백결을 빼내간 것이다. 사내는 잠시 어이없는 듯 서 있다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경험이 부족하다는 그 놈의 말이 맞는군.”

허나 사내는 실망스런 기색을 띠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자책하는 기색도 없었다. 특별히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다만 천천히 섭장천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는 방백린이 말한 천동의 우상이었다.
(제 91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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