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날 일 없는 학교는 계속 신날 일 없어라?

관성의 법칙과 자기 성찰에 대하여

등록 2006.03.23 10:26수정 2006.03.2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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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학교가 걸어서 십 분 거리다 보니 아침 출근길이 산책길이 될 때가 많다. 가끔은 가던 길을 멈추고 반 무릎 자세로 쪼그려 앉아 꽃인지 풀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작은 생명의 깜박거림에 숨을 죽이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 코를 박고 앉았다가 일어서면 출근길에 만나는 아이들이 어마어마하게 커보인다.

한 생명의 무게가 우주의 무게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실감나도록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한다. 눈을 감으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눈을 뜨면 다시 되살아 난다. 이런 당연한 현상을 마치 신비한 마술이라도 보여주듯 자못 흥분하여 목소리마저 떨린다.

"어때요, 여러분 눈짓 하나로 이 우주가 종말을 고하기도 하고 부활하기도 하잖아요. 여러분이 그런 존재인데 인생을 그렇게 함부로 살면 되겠어요?"

이런 썰렁한 유희를 더욱 썰렁하게 하는 것은 좁은 교실 탓이다. 좁은 교실은 눈을 감았다가 떠도 역시 좁은 세계일 뿐이다. 해서, 먼저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아이들의 눈을 감기기도 한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학교 뒷산의 푸른 숲과 나무들이 되살아나도록.

사람도 자연의 일부다. 어린 자연인 아이들을 하루종일 가두기에는 교실은 너무도 좁은 세계이다. 그 좁고 딱딱한 공간에서 온 하루를 보내야하는 아이들에게 섬세하고 가슴 큰 사람으로 성장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지난 방학 때 진주에서 선생님 몇 분이 나를 찾아오셨다. 고맙게도 그들은 내가 지은이로 되어 있는 책으로 독서토론을 한 모양이었다. 순천만과 선암사를 구경하고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한 아이가 지각을 자주 해요. 그래서 저도 매를 대지 않고 말로 잘 타일렀거든요. 아이도 제 말에 진심을 보이는 것 같긴 한데 행동은 달라지지 않는 거예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난들 무슨 뾰쪽한 수가 있을까? 내 대답은 군색할 수밖에 없다.


"글쎄요. 전 선생님이 잘하신 것 같은데요. 진심에 호소하면서 기다려보는 수밖에요. 쉽게 매를 대다 보면 차츰 그런 수고를 덜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몇 시쯤이나 학교에 나오는데요?"

"8시 10분이나 20분쯤에요."
"예? 그렇게 빨리 오는 지각생도 있어요?"
"우리 학교는 7시 45분이 등교시간이거든요."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조금은 화가 나기도 했다. 무리하게 등교시간을 앞당기다 보니 멀쩡한 아이를 대책 없는 지각생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조급해졌을까? 그것은 아마도 관성 때문이리라. 속도의 관성이랄까. 그것을 멈추게 하는 힘은 자기성찰에서 나온다. 불행하게도 학교에는 그것이 없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새롭게 다가온 하루와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학교로 달려와 밤늦도록 좁은 교실에서 하루는 보내야하는 아이들을 당연한 듯이 바라보는 어른들이 늘어가는 것은 슬프고도 위험한 일이다.

해마다 수많은 학생들이 성적비관으로 꽃다운 나이에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공부 자체가 힘이 들거나 공부의 양이 많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 무엇이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그것을 바로 내가 내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 결국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내가 원해서, 내가 사랑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노예처럼 끌려가고 있다는 것. 하루종일 책과 씨름하면서도 공부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를 모른다는 것. 아무도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둘러봐도 진실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 더 빠를까? 스스로 걷게 하는 것이 더 빠를까? 그 대답이 어렵지 않은 것만큼이나 교육문제의 해법도 간단할 수 있다. 속도를 줄이는 것, 바로 그것이다. 아이들의 등굣길이 산책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이런 일들이 왜 학교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신날 일이 없는 학교는 앞으로도 계속 신날 일이 없는 것이 당연한 관성의 법칙 때문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조금 보탰습니다.

덧붙이는 글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조금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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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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