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도 없이 아이들을 만날 뻔했습니다

아픈 만큼 사랑도 깊어졌습니다

등록 2006.03.13 09:16수정 2006.03.13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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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담임을 맡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의 첫 만남은 개학 다음날 영어 수업시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을 개학 다음날 만난 것은 올해 맡은 반이 1학년이기 때문입니다. 신입생들은 입학식이 끝나면 곧바로 담임 시간을 갖고 학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해야하기 때문에 아이들과의 첫 만남이 하루 뒤로 미루어진 것이지요.

그 하루 동안의 공백이 저에게는 참 좋은 약이 되었습니다. 약이 되었다는 것은 제가 어딘가 아팠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 맞습니다. 마음이 조금, 아니 많이 아팠습니다. 마음이야 늘 아프기도 하고 낫기도 하고 그러는 법인데 이번에는 좀 달랐지요. 방학 내내 아팠는데 개학 첫날까지도 그 아픔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새 학기가 되면 여기저기서 아이들은 초기에 '확' 잡아야 한다는 말들이 들립니다. 그 말이 만고의 진리처럼 통용되는 곳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은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아픔이 되지는 않습니다. 사랑은 더디지만 언젠가는 꼭 결실을 맺는다는 말을 저 또한 만고의 진리로 믿고 있기에 제 부족한 사랑만 탓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제 귀에 들릴 때마다 이렇게 코웃음을 쳤던 것이지요.

'아이들을 잡긴 왜 잡어? 사랑을 해도 될까 말까하는 아이들을'

제가 근무하는 학교가 실업계이다보니 아무래도 학습에 대한 '자기 동기'가 부족한 아이들이 많은 편입니다. 스스로 할 생각이 없는 아이들은 외부에서 할 수 있도록 도움이나 자극을 주어야하는데 문제는 그 방법입니다. 가령, 책도 공책도, 심지어는 볼펜조차도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경우, 손바닥을 몇 대 때린다든지 해서 초기에 따끔하게 버릇을 고쳐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매를 대지 않기로 제 스스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지요. 물론 사랑의 매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매를 대기 시작하면 매를 대지 않고 아이들을 지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맙니다. 교사들이 금방 나타나는 효과에 자꾸만 의존하다보면 아이들 스스로 자기 싹을 키워갈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기도 하겠지요.

어느 핸가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너무 떠든다 싶어서 몇 번 간곡하게 부탁을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한 아이를 불러다가 빗자루로 손바닥을 딱 한 대 때린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평소 매를 대지 않던 제가 처음으로 매를 대어 그것이 미안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매가 무서워 그랬는지 모르지만 매 한 대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못내 섭섭했고 아이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쉬운 길이 있었는데 그동안 참 멍청하게 아이들을 지도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요. 교사의 간곡한 말보다도 매 한 대를 더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이대로 둘 것인가?

입학식을 하던 날, 저는 다음날이면 수업시간에 만날 아이들을 먼발치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습니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에게 들려줄 감동적인 이야기도 채 준비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만약 아이들을 '확' 잡아야할 판이라면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의 내용도 달라져야하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친절한 교사가 되겠노라는 일종의 서약 같은 것을 해놓고 아이들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매를 대지 않으면 말로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잔소리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 아이를 우주보다도 더 존귀하게 여기고 그에 합당한 대접을 해주려는 것인데, 그런 깊은 마음은 헤아리지 않고 나를 물렁하게만 보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매를 대지 않고 말로 타이르는 것을 고마워하면서도 그것이 편한 나머지 자꾸만 버릇이 없어지는 아이들을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교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봄직한 이런 고민은 해마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이미 말끔히 지워지고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온 세상천지가 푸른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과도 같은 이치였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들은 한동안 죽은 듯이 있다가도 다시 힘 있게 피어나기 마련이니까요. 자연이 잠시 휴식을 취한 것처럼 저도 절대자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피곤한 심신을 잠시 쉬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올해는 느낌이 사뭇 달랐습니다. 봄이 왔는데도 저는 봄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또 두려웠습니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갈림길에 서서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서성이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아, 아이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갈수록 강제에 길들여지고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이들보다는 제 자신 무능교사가 되는 것이 더 가슴이 조이는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첫 수업을 하기 위해 출석부와 교과서를 챙겨들고 교실에 들어갔습니다. 임시 반장이라는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구령을 붙이려는 것은 만류하고 서로 손을 흔들며 영어로 인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이름으로 출석을 부른 뒤에 한껏 표정이 밝아진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영어에 소질이 있거나, 영어를 잘 하거나, 영어를 잘 못해도 영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세요."

서로 얼굴만 멀뚱히 바라볼 뿐 손을 드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여러분 중에 영어를 정말 못한다. 아니면 영어는 정말 싫다. 아니면 영어를 포기했다. 이런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번에는 손이 거의 다 올라갔습니다. 저는 이미 예상한 일이었음으로 실망하거나 놀란 기색이 없이 아이들을 향해 싱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곧 여러분은 영어를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저하고 내기해도 좋아요. 다만, 저에게 두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영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약속 말예요."

그날 저는 해마다 첫 수업시간에 그랬듯이 아이들 앞에서 친절 서약을 했습니다. 그 내용을 공책에 적게 한 뒤에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는 서약을 어길 때는 언제라도 지적을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지적하거나 따끔한 충고를 해준 사람에게는 벌금 내지는 고맙다는 뜻으로 만 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친절한 교사가 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교사는 학생에게 친절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교사에게 친절하게 대해줄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없으면 여러분을 가르칠 교사가 없어도 되고, 교사가 없으면 교사를 지도하고 감독할 교장 선생님도 계실 필요가 없으니까요."

저는 첫날 아이들을 잡기는커녕 더 일을 크게 벌이고 만 셈입니다. 그 말에 기가 펄펄 살아 일년 내내 저를 못살게 굴 것이 뻔한 데도 말입니다. 아니, 올해는 조금은 다르리라는 기대를 해보기도 합니다. 작년보다는 제가 아이들을 더 사랑할 생각이니까요. 많이 아팠던 만큼 말입니다. 더 많이 참고 더 오래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개학하고 아이들을 만나기까지 그 하루의 여백이 없었다면 저는 설렘도 없이 아이들을 만날 뻔했습니다. 아, 다행히도 그날 하루가 다하기 전에 저에게 한 가지 깨달음이 왔습니다. 하교 길에 운동장을 걸어가는 한 아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생명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생명을 대하는 설렘을 잃지만 않는다면 실패는 없다는 확신이 온 것이지요.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심약해진 저에게 내리신 선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 참되면 결실도 참되다는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출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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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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