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94회

등록 2006.03.23 08:23수정 2006.03.2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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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번이 형님들께 이런 못난 꼴 보여드려 죄송하오.”

화마 속에서도 용케 그리 상하거나 타버리지 않은 천막 안이었다. 침상에 눕혀지자마자 근심스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구양휘와 광도에게 건넨 말이었다.


“이곳에 들어오기가 그리 쉬었겠느냐? 그래도 생각보다 아주 멀쩡해 보여 다행이다.”

누가 보더라도 심상치 않은 독에 중독 되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담천의의 피부는 검붉게 변해 있었다. 메말라 터져 하얗게 변한 입술. 멀쩡한 곳이라곤 보이지 않는 피투성이의 몸.

허나 구양휘는 애써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위로했다. 이것이 형제의 정이다. 살아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을 찾아 이곳에 온 담천의가 고맙다. 제마척사맹의 맹주로 내정되었다 해서 들어 온 것이 아님을 안다.

“아무래도.....”

진맥을 시작한 갈인규가 주위를 둘러본다. 많은 인물들이 천막 안에 들어와 있다. 구효기를 비롯해 무당의 청송자, 각 파의 문주들..... 조용한 가운데서 진맥을 하고 치료를 해야 하는데 까마득한 무림선배들을 나가라고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

구양휘가 갈인규의 속내를 모를 바 아니다. 허나 자신도 제마척사맹의 맹주로 내정된 담천의를 핑계로 이곳에서 나가달라고 말할 위치도 아니다.


“아직 확답 드리기 어렵소. 차분하게 진맥을 해야 상세를 파악할 것 같소.”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이미 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좌중은 눈치 챘다. 허나 담천의는 여하튼 제마척사맹의 맹주다. 구효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담공자.... 고생하시었소. 지금 이런 상태에서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구효기가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은 간다. 그는 구효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소생의 고생이야 이곳에 계신 분들보다 더 했겠소? 여하튼 사부님은 만나보았소.”

“말씀을 나누셨소?”

“제마척사맹의 맹주로 소생을 내정했다는 것이 사실이오?”

“먼저 상의를 드리지 못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하오.”

“이제는 소생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피할 생각이 없소.”

그 말은 내정된 제마척사맹의 맹주 자리를 맡겠다는 의미다. 그 말에 좌중은 복잡한 기색을 띠었다. 거동도 못할 정도로 부상당한 몸으로 맹주 자리를 맡겠다니.... 그의 상태를 보고 느꼈던 좌중의 실망감을 전혀 모르는 것일까? 허나 구효기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변했다.....! 얼마 전의 담공자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리 변한 것일까?)

구효기는 담천의를 유심히 살폈다. 얼마 전까지 담천의는 소극적이었다.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지키는 것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혹시나 맹주자리를 거부하면 어떻게 할지 걱정했던 것이다.

“갈제.... 회복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담천의는 구효기와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진맥을 하고 있는 갈인규에게 물었다. 갈인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소한 움직이려면 오주야(五晝夜) 정도가 필요하오. 사실 왼팔은 어깨뼈가 상한 것이라 시간이 가면 회복될 거요. 문제는 형님 몸 전체에 퍼진 독이오. 골수에까지 스며들어 소제도 장담을 하지 못하겠소.”

“그래도....”

“최소한 열흘..... 길면....”

“알겠네.”

담천의는 다시 시선을 돌려 구효기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버틸 수 있소?”

이미 한 눈에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구효기는 대답하기 난감했다. 사실 자신도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다. 그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담천의가 좌중을 쭉 훑어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소생을 본 맹의 맹주로 인정하시오?”

말은 구효기에게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천막 안의 모든 인물들에게 던진 말이었다.

“물론이오.”

구효기가 얼른 대답했다. 이미 쏘아진 화살이다. 여기서 다시 왈가왈부할 수 없다. 청송자를 비롯한 모용화궁, 황보장성의 등 세가가주들의 고개가 끄떡여졌다. 담천의의 시선이 몽화에 가서 멎었다.

“최대한 수비에만 치중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몽화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맺혔다. 담천의의 변화된 태도에 내심 놀랐지만 자신에게 묻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첩에게 전권을 주시면 열흘 정도는 버틸 수 있어요.”

“좋소. 당신에게 전권을 주겠소. 당신은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의 생사여탈을 책임지시오. 만약 당신의 명을 거역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참할 수 있소. 구거사께서는 몽소저를 도와주시기 바라오.”

그러자 몽화가 최대한 공손하게 예를 취했다.

“맹주의 명을 받드옵니다.”

어차피 의도된 행동이고 말이다. 어려운 난국일수록 구심점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면 안 된다. 노회한 좌중이 그 의도를 모를 리 없지만 뭐라 반박을 하기도 전에 모든 결정이 끝났다. 구효기 역시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담천의는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여러분들과 이곳을 나가게 될 것이오.”

좀처럼 보기 드물게 자신 있는 말이었다. 비록 거동조차 하지 못하고 침상에 누워있는 몸이지만 그는 좌중에게 알지 못할 확신을 주고 있었다. 그 믿음은 여하튼 천마곡의 입구가 무너진 이후 처음 들어온 인물이었기에 더욱 신뢰를 주었다.

담천의는 이어 몽화와 구효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이곳에서 낭비할 시간이 있소?”

그 말에 몽화와 구효기는 당황했다. 자신들을 질책하는 것이다.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시행함이 원칙이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담천의에게서 비록 몸은 움직이지 못해도 일대종사의 위엄이 엿보였다.

“회의는 옆으로 옮겨 시작하겠어요.”

몽화가 예를 취하더니 먼저 몸을 돌려 천막을 빠져나갔다. 구효기 역시 서둘러 천막을 나서자 좌중들은 입맛을 다시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담천의의 옆에서 그것을 지켜본 우교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역시 호부(虎父) 아래 견자(犬子) 없다더니..... 말을 아끼지만 해야 할 때 단호하게 말하고, 일단 결정하면 과감하게 추진하는 용기..... 수장으로서의 자신감과 결단력.....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념을 주는 위엄...... 부친을 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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