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비에 새겨진 유배의 눈물

선비 마음 훔쳐보는 제주도 오현단

등록 2006.04.12 08:49수정 2006.04.1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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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제주도를 일컬어 '축복받은 땅'이라 부른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화산섬, 산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사계절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축복 받은 사람들의 터'. 그러나 알고 보면, 제주도는 그렇게 환상의 섬만은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주도는 유배의 땅이었다. 속된 말로 임금이 기거하는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귀양살이 터'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제주기행을 하다보면 한양에서 쫓겨난 선비들의 눈물자국을 엿볼 수 있다.


a '오현을 배향한 옛 터' 오현단

'오현을 배향한 옛 터' 오현단 ⓒ 김강임

제주시 이도1동 1421-3번지 오현단. 이곳에는 조선시대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선비들이 제주 땅에서 유배의 눈물을 흘렸던 자국이 있다. 온 세상이 봄꽃 소식으로 떠들썩한데, 제주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오현단에는 까치 두 마리가 제단을 지키고 있었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던데, 제주도로 유배 온 선비들은 얼마나 이 반가운 소식를 기다렸을까? 까치 울음소리를 들으며 당시 선비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a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의 석비에서 제주 유배생활의 아픔을 느껴보다.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의 석비에서 제주 유배생활의 아픔을 느껴보다. ⓒ 김강임

선비의 고충을 딛고 '오현을 배향한 옛 터'에는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오현은 1520년에 유배된 충암 김정, 1534년 목사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 1601년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1614년 유배된 동계 정온, 1689년 유배된 우암 송시열. '오현을 배향한 터'를 돌아보다가 그들의 눈물자국이 서려있는 5개의 석비를 발견했다.

세 번이나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북녘대궐을 향해 모리조아리는 충정, 벼슬에는 욕심없고 어부나 나무꾼이 소망이라는 소박함, 외로운 충신의 마음을 간절하게 뱉어 낸 흔적, 외딴섬에 어머님을 두고 온 천륜의 마음을 노래한 충신의 마음. 석비에 새겨진 글 구절에서 당시 유배생활의 아픔을 느껴본다.

a 우암 송시열의 해중유감

우암 송시열의 해중유감 ⓒ 김강임

여든이 넘은 늙은이가
만리 푸른 물결 한가운데 왔도다.
말 한마디가 어찌 큰 죄랴마는
세 번이나 내쫓겼으니 앞이 막혔구나
북녘대궐을 향해
머리를 돌려 보지만
남쪽 바다에는 계절풍만 부네
옛 은혜 생각하면
외로운 충정심에 눈물만 흐르는구나
-우암 송시열 <해중유감>-


우암 송시열의 해중유감 석비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북녘대궐을 향해 옛 충정심을 기리며 눈물 흘렸던 유배생활.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제주섬은 이렇듯 눈물의 섬이었다. 귀양 왔던 선비의 마음을 내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그러나 구절마다 새겨진 선비정신에 내 마음 또한 애절하다. 이 시대의 선비정신과 당시 선비들의 충정심에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 자신의 실리를 따지면서 적과의 동침도 불사하는 현세 사람들의 외로운 충정심은 과연 어떤 것일까?


a 충암 김정의 임절사

충암 김정의 임절사 ⓒ 김강임

외딴섬에 벼려진 유배생활, 선비의 처절한 마음, 천륜을 어기는 유배생활,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을 그린 충암 김정의 <임절사>는 가슴을 적신다.

외딴섬에 버려져 외로운 넋이 되려 하니
어머님을 두고 감이 천륜을 어기었네
이 세상을 만나서 나의 목숨 마져도
구름을 타고 가면 하늘 문에 이르니
귤원을 떠돌고도 싶으나
기나긴 어두운 밤 언제면 날이 세리
빛나던 일편단심 쑥밭에 묻게 되면
당당하고 장하던 뜻 중도에서 꺽임이니
아- 천추만세에 슬픔을 알리라
-충암 김정 <임절사>-



a 규암 송인수의 고충

규암 송인수의 고충 ⓒ 김강임

석비마다 새겨진 충신들의 마음은 모두 한양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 그러나 그들의 발자취는 지방 발전에 공헌하기도 했다. 그래서 역사는 후세인들에게 재조명 되나보다.

a 증주벽립(曾朱壁立). 철종 7년 판관 홍경섭이 새긴 송시열의 필적 마애명

증주벽립(曾朱壁立). 철종 7년 판관 홍경섭이 새긴 송시열의 필적 마애명 ⓒ 김강임

증주벽립(曾朱壁立). 철종 7년 판관 홍경섭이 새긴 송시열의 필적 마애명이 선비의 마음이련가? 오롯이 서 있는 병풍바위에 아주 협소하지만 오현의 자취가 새겨진 바위가 어쩌면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선비의 마음은 아닐런지.

a 김정 선생과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

김정 선생과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 ⓒ 김강임

따뜻한 봄날, 오현의 제단 앞에서 선비의 마음을 훔치려 서성이던 나는 까악-까악 울어대는 까치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다. 풍우에 씻겨나간 적려유허비는 선비의 마음인양 북녘대궐만 바라본다.

오현의 뜻 기리는 제단


오현단은 1971년 8월 26일 제주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 이곳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의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5현)을 기리고 있는 제단으로, 이들의 위패를 모시던 귤림서원의 옛 터에 마련되어 있다.

5현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 선생, 중종 29년(1534)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선생,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선생,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 선생,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선생 등 다섯 분이다.

고종 29년(1892)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비를 세우고 제단을 쌓아놓았는데, 원래는 선조 11년(1578)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 김정을 모시기 위한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현종 6년(1665) 판관 최진남이 이 묘를 장수당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은 뒤, 숙종 8년(1682)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김정 선생·송인수 선생·김상헌 선생·정온 선생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숙종 21년(1695) 송시열 선생도 함께 모시면서 5현을 향하게 되었으나,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 서원이 헐리게 되어, 그 터에 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단내에 있는 5현의 자취로는 철종 7년(1856) 송시열 선생의 글씨로 하여 판관 홍경섭이 바위에 새긴 ‘증주벽립’이라는 글씨와, 김정 선생과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가 남아있다. - 제주시청-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길 : 제주시- 제주성지-오현단으로 제주시동문재래시장 인근에 있다.

덧붙이는 글 찾아가는길 : 제주시- 제주성지-오현단으로 제주시동문재래시장 인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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