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443회

등록 2006.06.01 08:15수정 2006.06.01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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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 두 명이 정고헌(庭睾軒)으로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정고헌에는 오직 송하령과 서가화만이 묵고 있었다. 아마 두 여인을 위해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시비들이 들고 있는 생선과 육류요리를 보니 이미 전채(前菜)는 들어간 모양이었다.

한 시녀는 생선 한 마리를 모양 그대로 살려 튀긴 뒤 찐 것 같은 생선요리를, 또 한 시녀는 양고기를 얇게 저며 야채와 같이 볶아낸 요리를 들고 있었는데 보기에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시녀들은 정고헌 안채로 들어섰다. 손님인 두 여인은 그리 많이 먹지 않았다. 그저 젓가락을 대는 듯싶다가 내려놓는 경우가 많아 어차피 이 요리들은 자신의 몫이 될 터였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들 시야로 자신들과 같은 시비 차림의 여자가 앞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는 누구니?”

오른쪽에 있던 시비가 물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동공이 눈 위쪽에 있어 조금은 섬뜩해 보이는 삼백안(三白眼)을 가진 여자. 그녀는 요사스런 웃음을 흘리며 두 시비에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낯설고 무서워 보였던 여자가 미소를 짓자 이상하게도 같은 여자임에도 묘한 느낌이 들며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 잠시 너희들을 대신할 사람....”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두 시녀는 양 가슴 밑이 뜨끔하더니 자신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드는 것을 느꼈다. 자칫 떨어지려는 접시를 삼백안의 여자가 날렵하게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요사스런 웃음을 흘리며 송하령과 서가화가 식사를 하는 방 쪽에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당새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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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의 부친을 죽인 일은 내 실수였지. 아니 실수는 아니었어. 나는 그 당시와 같은 상황이라도 똑같은 실수를 했을 테니 말이야.”

허무했다. 이미 손불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오장육부가 다 녹아내리는 와중에서도 단심독이 든 술잔을 들이키고 있다.


“내 존재를 알고..... 내가 의도하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던 유일한 인물이 자네 부친이었네. 그가 비록 관직에서 물러나도, 그가 초야에 묻혀도 나는 그가 살아있는 한 안심을 할 수 없었네.”

그래서 담명장군은 모용화천을 죽이고자 했을 것이다. 모용화천을 죽이고자 하는 두 번의 시도 역시 그런 맥락이었고, 손불이는 또 다른 천지회의 회주가 됨으로서 모용화천이 아님을 믿게 했던 것이다. 거기에 이중삼중으로 모용화천이란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고.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이오?”

“내가 얻은 것....? 없네. 아무 것도 없지. 아니 있기는 있군. 천하는 영웅이 원하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천하를 가질 영웅은 하늘이 낸다는 사실 말일세.”

힘이 있다고 천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머리가 뛰어나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르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원장 같이 무식하고 못난 인간도 나라를 세웠는데 나라고 하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네. 더구나 주원장의 못된 행태에 참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네. 준비를 완벽하게 하려 했지. 천동을 얻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어.”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했다. 천동이 천마곡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백련교도들이 한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천지회의 힘과 백련교의 힘은 그에게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다. 천하를 쥘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모든 준비를 진행시켜 나가던 중에 절대구마의 후인들까지 태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 준 격이었다. 이미 백련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 방백린에게 절대구마의 후인들을 굴복시키게 했고 그 힘을 방백린이 쥐도록 만들었다.

“천지회와 백련교를 이용해 민심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아직까지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달탄을 이용해 움직이면 현 황실에 대한 민심의 이반은 당연할 것이라 생각했네. 그리고 중원 무림인 모두에게 영원히 공포스런 존재로 남아있는 절대구마의 후인들을 결정적인 순간에 내보내 무림인들을 휩쓸어 버리려고 했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어차피 살생은 불가피했고 굳이 천지회와 백련교의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중원 무림인들과 절대구마의 후인들이 양패구상(兩敗俱傷)할 즈음 천동이 나서 절대구마의 후인들을 완전하게 제압하면 중원의 모든 무림은 천동의 말을 듣게 될 것이란 계획이었지.”

무섭고 치밀한 금선탈각지계(金蟬脫殼之計)다. 민심은 이반되어 있고, 중원무림은 천동의 말을 듣게 된다. 황실은 어지러워지고 황실을 은밀하게 지키는 비원은 무림이라는 날개 죽지가 꺾인 상태다. 문인들 역시 오중회의 변신인 천지회에 동조할 것이고, 무력은 백련교와 천동의 힘으로 충분하다.

“자네의 부친이나 자네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네. 너무 뜸을 들였어. 시기를 놓친 것이야. 조카를 몰아내고자 연왕이 정난의 변을 일으켰을 때 움직여야 했어.”

“모든 것이 계획한대로 이루어진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소?”

“맞는 말이네. 하지만 너무 우쭐해하지는 말게. 자네의 부친이나 자네가 없었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가 대신했을 테니까...... 결국 하늘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 순간이었다. 다시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던 손불이가 잔기침을 했다. 그러자 그의 입술 끝으로 핏줄기가 새어나와 턱을 타고 흘렀다. 허나 손불이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따른 술잔을 들어 태연스럽게 마셨다.

“정말 훌륭한 독이군. 오장육부가 다 녹아 내려도 고통을 주지 않아. 갈유 그 친구 정말 완벽한 독을 만들어 냈어.”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나직하게 뇌까렸다. 이제는 확연하게 피가 입술을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이미 인간의 오장육부라 할 수 없는 상태. 아마 다른 사람 같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쿨럭..... 아직 할 말도 꺼내지 못했는데 목을 죄는군...... 내 한 가지 자네에게 제안을 하지.”

“.............?”

“나 역시 백련의 의미를 좋아하네. 허나 그들은 한계가 있지. 너무 이상적이네. 그 이상으로 인해 주원장에게 이용당하고 결국에는 버림받는 신세가 되었지. 나 역시 그들을 이용하려 했음은 부인하지 않겠네.”

손불이는 목이 자꾸 마르는지 다시 술을 따라 쭉 들이켰다.

“나는 내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을 접었다네. 그리고 중원에 퍼져있는 내 모든 수하들에게 움직임을 정지하고 우리만이 아는 열두 곳의 장소에 집결해 기다리라고 했네. 자네와의 약속에 의해 봉쇄된 천마곡도 그 중의 하나지. 나는 본 장에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내보냈다네. 마지막 희망을 자네에게 걸고 싶어서였지.”

방백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이미 손불이는 이런 모든 것을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헌데 자신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싶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손불이는 말을 하다말고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있던 반지를 힘들게 빼냈다. 손톱보다 조금 큰 호박이 박혀있는 반지였는데 호박에는 얼룩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또한 탁자 옆에 놓여있던 주사빛 붉은 책자와 함께 담천의에게 건네주었다.

“무슨 뜻이오?”

그 반지를 건네받은 담천의는 호박에 있는 자국이 얼룩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세 송이의 목단화(牧丹花) 문양임을 알았다. 세공(細工)의 명인이 만든 귀한 보석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만약 자네가 이 반지를 끼고 그들을 찾아간다면 자네의 명에 따르도록 부탁해 놓았다네. 자네가 대신 추구해 왔던 일을 마무리해줄 수는 없는가? 백련의 세상이든 아니든 상관없네. 최소한 태어나면서부터 배부른 자와 굶주리는 자로 구분되는 세상이 아니라면 만족하겠네.”

모든 것을 담천의에게 주겠다는 말이었다. 담천의는 손불이의 돌연한 제의에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자신의 일을 모두 망치고, 더구나 자신의 아들까지 죽인 자에게 자신이 추구했던 일을 이루어 달라니...? 손불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얼마나 재미있는가? 자네는 균대위의 힘과 제마척사맹의 힘도 가지고 있네. 거기에 내가 가진 모든 힘을 가지게 된다면 자네 마음 여하에 따라 중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네.”

“나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항명이라니.....? 황실을 뒤엎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일이다. 담천의가 선뜻 승낙을 하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자 손불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 부친을 죽일 수 있도록 모든 상황과 시기에 대한 정보를 흘려준 곳은 비원이었네.”

마치 담천의의 뇌리에 각인을 시키듯 또박또박 말했다. 순간 담천의는 머리에 둔기를 맞은 듯 멍해졌다. 지금까지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것이었다. 부친을 죽인 것은 비원이었다. 모든 상황을 만들어 놓고 다른 자의 손을 이용해 죽인 것이다.

“자네 역시 마찬가지지..... 그들이 자네를 이곳에 오게 한 것은 바로 내 손에 자네가 죽기를 바랬던 것이야...... 나는 송하령 그 아이를 보호하고 싶었다네. 그들 손에 이용당하지 않고 잘 살기를 바랬어....... 아마 자네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면 내 아들과 짝지어 주려고 했을 것이야. 황후가 되기에 너무나 적합한 여아이지.”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분노가 치솟고 있었다. 허나 그는 이를 꽉 문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자신은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심도, 권력에 대한 욕망도 가진 적이 없었다. 지금의 분노는 그저 자신의 부친을 교묘하게 죽이고 자신을 이용한 비원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죽고 나면 비원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네가 되겠지. 지금 결정하라는 것이 아니네. 내가 가진 힘은 자네를 꽤 오래 기다릴 게야....... 나는 그들을 이끌면서..... 그들 서로를 모두 알게 하지 않았네...... 그들은 나나 나를 대신한 자네가 아니면 뭉칠 수 없네. 쿨럭.....천천히 생각해 보게. 송하령 그 여아는 지금 정고헌에 있네......”

손불이의 상체가 뒤로 점점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기침이 나오고 말이 끊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그 때였다. 밖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보인 사람은 바로 모용화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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