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급 전범 사면 결의, 일본 측 명분은 무엇이었나?

1953년 일본 중의원 '전범 사면에 관한 결의' 소개

등록 2006.06.04 12:06수정 2006.06.0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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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싸고 일본은 물론 한국·중국·미국 등 주변국에서 논의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중국은 "일본 총리가 A급 전범에게 제사 지내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참배하는 것은 피해국 국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에는 공식적으로 A급 전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미 1956년 3월말까지 일본인 A급 전범이 모두 사면되었고, B·C급 전범 역시 1958년 5월말까지 모두 사면되었기 때문이다. 야스쿠니 신사 측으로서도 A급 전범 분사(分祀)를 거부할 만한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는 것이다.

A급 전범의 사면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11조(전쟁범죄 조항)에 근거한 것이다. 이 조문에 따르면, 극동국제재판소에 대표자를 파견한 국가의 과반수와 일본이 동의하는 경우에는 전범에 대한 사면·감형·가출소를 집행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다른 재판소에서 판결을 받은 전범의 경우에는 형벌을 집행한 국가와 일본의 동의가 있어야만 사면·감형·가출소가 집행될 수 있도록 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사면권 인정

그렇다면, 전후 일본인들은 어떤 명분으로 A급 전범들을 사면한 것일까? 일본인들의 논리는 여러 차례에 걸친 일본 국회의 사면 결의에 잘 나타난다. 그중에서 1953년 8월 3일자 중의원 본회의 결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결의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지지 하에 전원일치 찬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전범의 사면에 관한 결의'라는 제목 하에 일본정부를 상대로 전범에 대한 전면적 사면 추진을 촉구하는 이 결의는 다음과 같은 서두로 시작한다.

"(오는) 8월 15일 아홉 번째 종전기념일을 맞이하는 오늘, 게다가 독립한 지 15개월을 경과했는데, 국민의 비원인 전쟁범죄에 의한 수형자의 전면 사면을 보는 데에 이르지 못한 것은 국민 감정상 견딜 수 없는 것이고 국제 우호 상으로도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전범에 대한 사면을 일본 국민의 비원이라고 하였고, 전범에 대한 전면적 사면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국민 감정상 견딜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국제 우호 측면에서도 유감스러운 것이라 했다.

일본이 한국·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게 가한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에 대해 진심어린 반성을 하기보다는, 도리어 국민감정과 국제 우호를 내세워 전범 사면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더 급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그보다는 전범에 대한 사면을 더 우선시하였던 것이다. 상식적인 경우라면, 피해국 국민들을 의식해서 짤막한 '립 서비스'라도 했어야 하는데, 당시 일본 국회의원들에게는 그 정도의 여유도 없었던 모양이다.

국민감정과 국제우호가 사면 명분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전범에 대한 사면이 중화민국·필리핀·호주 등의 국제적 지지를 얻고 있음을 지적한 뒤에, 지금이 사면을 단행할 만한 좋은 기회이므로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의문의 뒷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도 나온다.

"우리나라의 완전 독립을 위해서도 또한 세계평화·국제친교를 위해서도 신속하게 (사면) 문제의 전면적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긴요한 사안이라고 확신한다."

이 부분 역시 일본의 완전 독립과 세계평화를 위해서 전범 사면이 신속히 필요하다는 논리다.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침해한 전범들을 사면하는 것이 어떻게 세계평화를 위한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물론 어느 나라든지 간에 자국과 자국민의 이익을 첫째로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 점은 패전국 일본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인류를 상대로 전쟁범죄를 자행하다가 패망한 지 불과 10년도 안 되는 시점에서 일본이 위와 같은 중의원 결의를 하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것이다.

이처럼 패전 직후에 일본 국회와 정부 등이 사면을 주도했기 때문에, 오늘날 야스쿠니 신사가 A급 전범에 대한 분사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야스쿠니 신사만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인류와 역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국민적 가치관을 문제 삼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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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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