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냐?"

토마토 세 알이 주는 작은 행복

등록 2006.07.02 08:21수정 2006.07.02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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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비가 내리는 새벽 밭은 풍성하기만 합니다. 10여 가지가 넘는 야채들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많은 종류의 풀들도 풍성합니다. 4단계로 이뤄진 산비탈 다랑이 밭, 저 밑에서부터 산 밑자락까지 손제초의 끝을 본 지가 이틀도 채 안됐는데 장맛비로 다시 풀들이 우수수 일어서 있습니다. 올해 들어 네다섯 차례, 아마 그 이상 풀을 뽑았는지도 모릅니다.


풀 뽑을 때 쓰던 면장갑들이 일주일이 지나면 빨래 줄에 줄줄이 늘어섭니다. 그 대가로 3개월 동안 백만 원 정도의 큰 수입을 올렸습니다. 아직 자급자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좋은 먹을거리를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야채 배달을 나설 때마다 기분이 참 좋습니다.

뽑고 뽑아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온갖 풀들처럼 온갖 밭작물들 역시 수확하고 수확했는데도 여전히 풍성하기만 합니다. 내가 땀 흘린 만큼 하늘과 땅은 끊임없이 풍성한 먹을거리들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양파며 감자 캐기는 이미 끝났고, 콩 모종 옮겨심기도 끝냈습니다.

오늘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토마토들이 유난히 예쁘게 다가옵니다. 토마토뿐만이 아닙니다. 아이들 간식거리도 심어놓은 20여 포기의 참외를 비롯해 고추며 오이 가지들도 주렁주렁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밭 가장자리를 비집고 올라오는 풀들조차 싱싱하게 다가옵니다.

풀을 뽑으려고 면장갑을 끼다가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이들도 다 같은 생명인데 차마 손이 가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토마토 주변의 풀을 뽑아 그 밑동에 가지런히 누여 놓으며 사람들에게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생명의 밑거름이 되길 기원해 봅니다.

토마토 맨 아래에 매달린 녀석들 중에 성급하게 얼굴을 붉히는 녀석이 보였습니다. 어른 주먹만큼이나 큰 녀석들 틈에 있는 어린아이 주먹 정도의 작은 녀석이었습니다. 저기도 있고 또 저기도 있었습니다. 30포기 중에 먹을 만큼 익은 토마토가 모두 3개였습니다. 우리 네 식구에 딱 한 개가 부족했습니다.


작은 토마토 3개를 반바지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닭 먹이로 주기 위해 철지난 브로콜리를 한 다발 뽑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허리춤이 헐렁한 바지 주머니가 축 늘어집니다.

문득 밭을 일궈 우리 7남매를 먹이고 가르치셨던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고작 자식 둘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사를 짓고 있지만 아버지는 나보다 세 배 이상의 농사를 지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반쯤은 도시를 통해 벌어먹고 있으니 아마 여섯 배가 넘는 농사를 지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주로 참외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새벽 밭에 나갔다가 돌아오시면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무녀리 배꼽참외들을 마루에 우르르 쏟아 놓으셨습니다. 자식들이 7남매나 됐으니 아버지의 바지춤은 더욱더 축축 늘어졌을 것이었습니다.

밭에서 돌아와 닭들에게 싱싱한 야채 먹이를 주고 나서 아이들과 아내를 불러 모았습니다.

"자 이거 봐라, 첫 수확여, 작지만 디게 맛있게 생겼지, 잉."
"3개네, 아빠 거는?"
"나는, 아까 밭에서 먹었어"

식구들에게 토마토를 건네는 순간, 언제나 자신의 먹을거리를 챙기지 못했던 아버지의 손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흉내 낼 뿐이었습니다. 솥뚜껑 같았던 아버지의 손을 따라 잡으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감사의 기도' 대신 디카를 꺼내들었습니다.

"잠깐만, 첫 수확물이니께 사진 한방 찍어 놓자."

사진을 찍자마자 녀석들은 덥석 덥석 토마토를 깨뭅니다.

"맛있냐?"

녀석들은 한입 두입 베어 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합니다. 몇 입 거리도 안 돼는 아주 작은 토마토 한 알이지만 맛있게 먹어주는 녀석들이 고마웠습니다. 첫 수확물이라서 솔직히 나도 한입 베어 물고 싶었습니다. 그 심정을 알았는지 아내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몫인 작은 토마토를 불쑥 내밉니다. 반쯤 깨물고 아내에게 건네줬습니다.

나는 토마토를 우물거리며 다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토마토는 아주 오래 전 아버지가 새벽 밭에서 따왔던 무녀리 참외만큼이나 달콤했습니다. 목이 메도록 달콤한 '토마토의 작은 행복'을 아버지에게 드리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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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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