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반공웅변대회라도 열었단 말여?"

증오보다는 사랑과 평화 가르치는 학교이길

등록 2006.06.28 10:07수정 2006.06.2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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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큰 아이 인효 녀석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툴툴거립니다.


"에이 재수 없어!"
"이 눔이, 좋은 말 놨두구, 왜?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오늘 발표회가 있었는데, 글쎄, 김00가 북한 공산당을 없애버리고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는 거여, 그게 말이나 돼 북한 공산당을 없애는데 어떻게 평화통일을 할 수 있어? 말도 안 돼잖어? 그래놓고 지가 잘했대."

a 지난 2005년 8.15민족대축전에 참가했던 송인효(오른쪽).

지난 2005년 8.15민족대축전에 참가했던 송인효(오른쪽). ⓒ 송성영

아직도 아이들에게 북한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반공대회를 열고 있단 말인가? 순간 화가 났습니다. 사랑보다는 증오를, 평화보다는 파괴를 가르쳤던 우리 어린 시절 '국민학교'의 잔재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그런 쓰레기 같은 역사를 우리 아이들에게 대물림해주고 있단 말인가?

"그게 뭔 소리여? 지금이 어느 시댄디, 학교에서 반공웅변대회라도 열었단 말여?"
"반공웅변대회가 뭔디?"
"아빠 어렸을 때 있었던 건데, 북한 공산당은 무조건 때려 부숴야 한다는 거, 북한 사람들을 미워하게 만드는 아주 못 돼먹은 대회지."

인효 녀석만큼이나 나 역시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반공웅변대횐가 뭔가는 아니구, 나의 주장 발표대회라는 것을 했는데, 김00가 북한 사람들은 하고 싶은 거 하지도 못하고 잘 먹지도 못 먹고 불쌍하니까, 북한 공산당을 없애버리고 평화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더라구."
"그래서?"


"그러면 안 되잖아, 그게 무슨 평화통일여"
"니 말이 맞어, 그건 평화통일이 아녀, 나쁜 점은 서로 고쳐 나가고, 부족하면 서로 돕고, 좋은 일은 같이 하고, 그렇게 서로 함께 인정하면서 통일해야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통일은 절대로 안돼, 서로 싸우는 일만 있는겨."

계속해서 맞장구를 쳐주자 녀석은 점점 기세를 올렸습니다.


"북한이 가난하면 도와줘야지 없애버리면 되나! 또 가난하다고 불쌍한 것은 아니지."
"그려, 너 말 잘했다. 북한은 분명 우리보다 가난하지만 불쌍하지는 않아, 북한에서 보면 우리가 더 불쌍한지도 모르지, 미국에게 굽신거리며 먹고 산다고 볼 수 있으니까, 그건 잘 먹고 사는 게 아닌겨, 비굴하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난하지만 떳떳하게 사는 것이 속 편할 수도 있어."

"김00, 아주 못됐어, 나의 주장 발표할 때, 북한 말까지 다 없애버리고 표준어로 고쳐 놓아야 한대."

a 지난 2005년 '8.15민족대축전'에 참가해 한반도기를 흔드는 송인효.

지난 2005년 '8.15민족대축전'에 참가해 한반도기를 흔드는 송인효. ⓒ 송성영

녀석은 김00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맞장구를 쳐주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나는 슬쩍 한 발 뒤로 물러섰습니다.

"김00가 잘 몰라서 그런 거여, 그렇다고 화내고 미워하믄 안 되지…."
"…."

함께 '김00 성토대회'를 하던 내가 주춤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녀석은 배신감을 느꼈는지 갑자기 말문을 닫았습니다.

"김00하고 얘기 해봤어?"
"북한 공산당을 없애면서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겠냐구 얘기했지, 했는데 김00가 나보고 웃기지 말래잖어, 어이구 저나 웃기지 말라구 하시지."

녀석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습니다. 딴에 남북이 사이좋게 이뤄야 할 평화 통일에 대해 설명하려 했는데 김00가 웃기지 말라는 식으로 무시했던 것 때문에 더욱 더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김00 발표할 때 선생님들은 뭐라 하시데?"
"그냥 듣고만 있었지."

초등학교 5학년, 역사에 관심이 많은 녀석은 우리 어린 시절에 비하면 북한에 대해 너무나 너그럽습니다. 체 게바라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송인효. 우리 시절 인효 같은 녀석이 있었더라면 당장 '빨갱이 새끼'로 낙인 찍혔을 것입니다.

며칠 후 학교에서 돌아온 녀석이 또 다시 투덜거립니다. 북한 공산당은 물론이고 북한 사투리까지 없애 버리고 통일해야 한다는 김00의 '나의 주장 발표'가 학교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김00의 '나의 주장'은 그냥 김00의 주장이거니 했었는데, 그 주장이 학교를 대표하는 최고의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김00 개인의 주장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혼잣말 해놓고 생각해 보니 웃기는 소리였습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입니까? 북한을 쳐부수고 통일해야 된다고 소리 높여 강요했던, 거기에 반대하면 빨갱이로 몰아붙였던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의 연사'들이 부활하고 있는 시대가 아닙니까? 그들이 온갖 부정한 짓 다 저질러도 밥 한 숟가락 더 얻어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떠받들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아닙니까?

김00가 북한 체제를 무너뜨리고 통일해야 한다는 논리로 상을 받은 것은 분명 '박정희 독재정권의 연사'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요즘 '수상한 시절'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씩씩거리는 인효 녀석에게 뭐라 적당히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김00 미워하지 마라, 잉. 선생님들두…."

한마디 던져놓고 돌아서 생각해 보니 아주 무책임한 말이었습니다. 나의 어린 시절,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그 자리에 증오심으로 중무장시킨 '박정희 독재 정권의 연사'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은 고사하고 그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다시 득세하고 있는'수상한 시절'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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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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