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큐 이즈 '고. 맙. 습. 니. 다'"

시골 촌놈, 프랑스 모자 손님 치른 날

등록 2006.07.21 18:48수정 2006.07.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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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영어로 말하는 외국인이었습니다.


"여기는 공주 고속버스터미널입니다."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못하는 먹통이라 해도 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뭐라고 대답했냐고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거기서 기다리세요. 30분 후에 만나겠습니다."

1970년대 중학교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지만 분명 통했습니다. 20여분 후, 전화 약속대로 그 외국인을 공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영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프랑스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은 클레르 올리쉬. 아들 루와 함께 왔습니다. 이들은 <오마이뉴스> 세계시민기자포럼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만남] 시골까지 온 프랑스 모자, 일단 마중에 성공

포럼이 열리던 마지막날, 내 입을 통해 우리 가족의 사는 이야기가 짧게 소개되었는데 어떻게 핸드폰도 없이 농사와 글을 쓰며 적게 벌어먹고 살고있는지 그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는 그녀, 볼거리도 갈 곳도 많을 터인데 우리 집에서 한나절을 보내겠다고 하니 고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말이 통하고 안 통하고를 떠나서 아무 때나 원하는 시간에 찾아오라고 했고, 약속대로 공주고속버스 터미널로 불쑥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녀의 나이는 48세. 나보다 한살 더 많았습니다. 우리 나이로 따지자면 두 살이 더 많겠죠. 내가 포럼 참가자들 중에 영어실력이 가장 뒤떨어진다는 것을(거의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던) 빤히 알면서도 낯설고 낯선 한국의 시골 촌놈에게 통역자 한 사람 없이 찾아온 그녀도 참 대단했습니다.

터미널에서 우리 집으로 오는 동안 서로 뭐라뭐라 주고받았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비가 계속해서 오네요" "여기서 우리 집까지 10여분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아내가 나보다 영어를 잘 합니다" 서너 마디 정도 소통했을 것입니다.

우리집에 도착하면 소통이 한결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대학 4년 동안 줄곧 장학생으로 다녔다는 아내를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요.

헌데 아내도 별수 없었습니다. 내가 70년대 초의 중학교 영어 실력이라면 아내는 80년대의 중학교 영어실력에 불과했습니다. 영어를 접하지 않은 지 20년이 다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영사전을 옆에 끼고 있어서인지 나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인터뷰] 70년대 중학 영어, 불어 뒤섞인 영어

a 인터넷 어떤 사이트에 들어가 번역기를 이용해 서로 대화 했습니다.

인터넷 어떤 사이트에 들어가 번역기를 이용해 서로 대화 했습니다. ⓒ 송성영

그녀는 우리 가족을 취재하여 자신이 기고하고 있는 프랑스의 농업전문 신문(타블로이드판)에 게재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프랑스 모자의 우리 집 방문을 <오마이뉴스>에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외국어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프랑스 사람들의 속성이 그러하듯이 사실 불어를 섞어서 말하는 그녀 역시 영어에 능통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긴 머리에 키가 껑충한 그의 아들 루는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앉아 서로를 이해시키려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는지 히죽히죽 웃고 있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서도 한영사전조차 꺼내 보려 하지 않는 내게 아내가 답답한지 한 마디 합니다.

"인효 아빠 영어 좀 배워야겠다."
"나같은 놈이 있어야 통역하는 사람들도 먹고 살고, 또 다들 영어로 상대하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말을 언제 경험해 보겠어."

아주아주 간단한 생활 영어는 이런저런 단어를 총동원해 어느 정도 소통은 가능했지만 인터뷰를 위한 복잡한 영어는 소통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나는 간단한 질문을 던질 수는 있었지만 상대방의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내가 머리를 긁적거리면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인터넷을 뒤적거리더니 번역에 관련된 사이트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영어와 한국어 자판을 번갈아가며 두들겨넣어 앞뒤 문장이 맞지 않은 조악한 번역문을 서로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동안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에 몇 꼭지의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는 그녀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에서 20년 동안 방송과 신문에 관련된 일을 해왔다고 합니다. 주로 농업에 관련된 기사를 써왔다고 합니다.

그 기사들을 모아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그 책을 우리에게 선물했습니다. 책을 아주 좋아한다는 그녀에게 나 역시 내가 쓴 책을 선물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읽을 수 없는 책을 받아들고 책에 실린 사진만 열심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점심] 열여덟살 루는 된장찌개에 밥 두 공기를 비웠다

a 된장찌개에 채소가 전부였는데 올리쉬의 아들 루는 두 그릇씩이나 비웠습니다.

된장찌개에 채소가 전부였는데 올리쉬의 아들 루는 두 그릇씩이나 비웠습니다. ⓒ 송성영

점심은 우리 집에서 늘상 먹는 밥상 그대로 차렸습니다. 올리쉬 모자는 우리가 직접 가꾼 채소와 작은 뚝배기에서 바글바글 끓는 된장찌개에 만족한 얼굴 표정을 내보였습니다.

두 모자는 채소 쌈을 썩 잘 먹었습니다. 쌈에 넣는 된장을 '콩 발효식품 이라고 했더니 맛이 좋다고 합니다. 올리쉬의 아들 루는 아침 식사를 제대로 못했는지 밥을 두 그릇씩이나 말끔히 비웠습니다. 올해 열여덟살인 루는 대학에서 우주과학에 관련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풀과 더불어 자라고 있는 채소밭과 직접 만들어 쓰고 있는 거름더미를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녀는 한창 벌레들에게 갉아먹히고 있는 채소밭을 둘러보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듭니다.

그녀는 자연농으로 가꾼 채소 밥상으로 홈스테이 사업을 하면 어떻겠냐고 묻습니다. 대충 그 의미를 알아들었지만 영어가 짧은 나로서는 거기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맘씨 좋은 손님들이 찾아와 서로 고마워하며 머물러 가는 게 좋다. 사업을 벌이게 되면 지금처럼 서로의 고마움을 잘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돈을 받고 그들을 접대하려면 즐거움보다는 그만큼 사는 게 힘들어질 것이다. 나는 이대로 뱃속 편하게 사는 게 좋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저 손사래를 치며 바보처럼 헤벌쭉 웃기만 했습니다. 홈스테이 사업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손사래로 전달됐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도 웃습니다.

우리는 채소 밭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우리 집 큰아이 인효 녀석의 소금 연주와 피아노와 기타연주를 썩 잘한다는 루에게서 솜씨좋은 통기타 연주를 들었습니다.

[저녁] 양볼 비벼대는 프랑스식 인사, 따뜻하네

a 올리쉬의 아들 루가 솜씨좋은 기타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올리쉬의 아들 루가 솜씨좋은 기타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 송성영

저녁 무렵, 한국의 사찰과 태권도에 관심이 많은 올리쉬 모자와 함께 집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계룡산 갑사를 둘러보고 거기, 갑사 공양간에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올리쉬 모자는 한국의 전통 사찰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며 무척 신기해했습니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갑사를 둘러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절 음식이 맞지 않아 적게 먹어 배가 고플거라 여긴 아내는 자꾸만 "아 유 헝그리?"를 반복했고 그녀는 괜찮다면서 "땡큐"로 답합니다.

올리쉬 모자는 아침 일찍 대전을 거쳐 경주 불국사에 들러 다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 잘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를 나누다가 늦은 밤, 공주 터미널 근처에 올리쉬 모자가 묵을 숙소를 잡았습니다.

올리쉬 모자는 하루종일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며 맥주를 사겠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멀리서 온 손님이니 우리가 사겠다고 하니까 그러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합니다.

나는 여행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버스터미널 주변에 있는 편의점으로 안내했습니다. 편의점에서 각자 캔맥주와 음료수 한 깡통씩을 비우고 나서 작별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녀는 프랑스식 인사를 나누자며 아내를 껴안고 양쪽 뺨에 입을 맞췄습니다. 그녀의 아들 루 역시 내게 다가와 내 양볼에 자신의 볼을 비벼댔습니다. 루의 볼은 부드럽고 따뜻했습니다.

[헤어짐] 우리의 만남을 한 단어로 줄이면 '고맙습니다'

a 큰아이 인효가 소금연주를 선보였습니다.

큰아이 인효가 소금연주를 선보였습니다. ⓒ 송성영

이제는 진짜로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그녀가 땡큐를 한국어로 어떻게 말하냐고 다시 묻습니다. 집에서 알려줬는데 잠시 잊은 모양입니다.

"땡큐 이즈, 고맙습니다. 고. 맙. 습. 니. 다."
"고. 맙. 습. 니. 다?"
"예, 맞아요. 멕쉬 보크, 탱큐, 고맙습니다."
"고. 맙. 습니다."
"예, 우리도 역시 방문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랬습니다. 우리 가족과 올리쉬 가족의 만남은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맙습니다'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땡큐'는 우리가 만나 사용한 언어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한 언어이기도 합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서로 이메일로 연락하자 약속했지만 아마 이들 모자와 우리 식구는 평생 얼굴을 맞댈 수 없을 것입니다. 저만치서 그들 모자가 웃는 얼굴로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입가의 미소, 그들은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나 역시 멀리서 찾아와 준 그들이 고마웠습니다.

국경을 초월해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온 세상에 사랑과 평화가 가득할 것이 아닌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영어 소통이 시원찮아 올리쉬 모자의 얘기들이 제대로 옮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덧붙이는 글 영어 소통이 시원찮아 올리쉬 모자의 얘기들이 제대로 옮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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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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