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
1번국도를 타고 광주에서 목포로 가다 무안에 이르러 해제반도로 꺾어들면, 민초들의 질긴 명줄마냥 끊어질 듯 가늘게 도로가 이어져있다.
그 도로 좌우로 바다와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다. 밀려오는 물길이 도로를 덮을 듯 갯벌을 좇아 황토밭으로 밀려온다. 구릉지 황토밭에는 막 뽑아 놓은 양파들이 갈무리되지 않은 채 누워 있다.
6월이면 마늘작업, 양파작업, 모심기, 낙지잡이, 바지락 작업 등 서남해안의 어촌 마을들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만큼 바쁜 철이다. 그 길 끝자락에 신안군의 면 소재지 중 유일하게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섬 '지도'가 육지 것들을 유혹하고 있다.
지도읍은 송도, 사옥도, 어의도, 포작도, 선도, 율도 등의 작은 딸린 섬으로 이루어져있다. 신안의 유일한 '읍'지역이며, 1980년 인근 증도면이 분리되기 전까지 면적과 산업 그리고 인구의 측면에서 신안의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옛 뱃길, 문화의 통로였다
신안군 지도읍과 무안군 해제가 연결(1974)되면서 섬 아닌 섬이 되어버린 지도는 낙월도와 임자도 그리고 목포로 잇는 정기여객선이 새우젓을 싣고 지나는 중요한 뱃길이었다.
새우젓을 나르던 그 뱃길은 고대 중국과 문화를 교류하던 뱃길이었고, 한양으로 세곡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이 이동하는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또 임진왜란 시 해로를 따라 한양으로 진격하하는 왜군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뱃길이었다.
이순신이 울돌목싸움 이후 숨을 고르며 전열을 가다듬었던 고하도가 지척에 있다. 그런 탓인지 임자도와 지도에는 일찍부터 수군진이 설치되었으며, 한말(1896)에는 지도군이 창설되었다. 완도와 함께 섬으로만 이루어진 군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섬에 대해 중앙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 섬의 경제·군사적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조선초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을 펴왔던 중앙은 섬을 소나무를 기르는 '양송지'와 말을 기르는 '목장지'로 적극 활용했다.
지도 역시 대표적인 목장지의 하나였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은 민초들을 동원해 섬의 목장지를 개간하여 '둔전'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어염과 어장 등 수산물을 개발해 이속을 채웠다. 지금도 간혹 섬에는 '둔전리'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도시 목포생활권에서 무안생활권으로 바뀐 지도사람들이 하는 지역자랑 중에 하나가 '향교' 이야기이다. 1896년 지도군이 설치되면서 '하나의 군에 하나의 향교를 둔다'는 원칙에 따라 성균관의 주선과 지역 내 유림들의 건의로 1897년 지도항교가 건립되었다.
지도 향교는 지도읍 진산인 봉정산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대성전, 명륜당, 양사재 등이 남아 있다. 다른 지역 향교들의 역할이 약화되던 시기에 세워진 지도향교는 이미 이곳에 유배되어 지역인재를 기르던 김평묵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의 지도층을 결집하는 역할을 했다.
중암(重庵) 김평묵은 경기 포천출신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1800년대 영남지역 유생들의 위정척사 상소문에 감복하여 척양과 척왜의 소(疏)를 초안했다 왕의 노여움을 사 이곳에 유배되었다.
지도읍 두류산에 세워진 두류단에서는 매년 음력 9월 15일이면 일명 오선비(이항노, 기정진, 김평묵, 최익현, 나유영)를 모시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지금은 육로를 이용하지만 뱃길을 이용하던 한말까지 해로를 끼고 있는 지역은 육지의 다른 어떤 곳 보다 외부 와 문화 접촉이 훨씬 쉬웠고 다양했다.
여기에 육지에만 설치되던 향교가 지도에 설치되고 보니 지역유림들의 입장에서는 자긍심이 대단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