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을 일궈 지탱해온 삶

[섬이야기 40]전남 신안군 지도

등록 2006.07.08 10:45수정 2006.07.0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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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1번국도를 타고 광주에서 목포로 가다 무안에 이르러 해제반도로 꺾어들면, 민초들의 질긴 명줄마냥 끊어질 듯 가늘게 도로가 이어져있다.

그 도로 좌우로 바다와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다. 밀려오는 물길이 도로를 덮을 듯 갯벌을 좇아 황토밭으로 밀려온다. 구릉지 황토밭에는 막 뽑아 놓은 양파들이 갈무리되지 않은 채 누워 있다.


6월이면 마늘작업, 양파작업, 모심기, 낙지잡이, 바지락 작업 등 서남해안의 어촌 마을들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만큼 바쁜 철이다. 그 길 끝자락에 신안군의 면 소재지 중 유일하게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섬 '지도'가 육지 것들을 유혹하고 있다.

지도읍은 송도, 사옥도, 어의도, 포작도, 선도, 율도 등의 작은 딸린 섬으로 이루어져있다. 신안의 유일한 '읍'지역이며, 1980년 인근 증도면이 분리되기 전까지 면적과 산업 그리고 인구의 측면에서 신안의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옛 뱃길, 문화의 통로였다

신안군 지도읍과 무안군 해제가 연결(1974)되면서 섬 아닌 섬이 되어버린 지도는 낙월도와 임자도 그리고 목포로 잇는 정기여객선이 새우젓을 싣고 지나는 중요한 뱃길이었다.

새우젓을 나르던 그 뱃길은 고대 중국과 문화를 교류하던 뱃길이었고, 한양으로 세곡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이 이동하는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또 임진왜란 시 해로를 따라 한양으로 진격하하는 왜군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뱃길이었다.


이순신이 울돌목싸움 이후 숨을 고르며 전열을 가다듬었던 고하도가 지척에 있다. 그런 탓인지 임자도와 지도에는 일찍부터 수군진이 설치되었으며, 한말(1896)에는 지도군이 창설되었다. 완도와 함께 섬으로만 이루어진 군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섬에 대해 중앙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 섬의 경제·군사적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조선초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을 펴왔던 중앙은 섬을 소나무를 기르는 '양송지'와 말을 기르는 '목장지'로 적극 활용했다.


지도 역시 대표적인 목장지의 하나였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은 민초들을 동원해 섬의 목장지를 개간하여 '둔전'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어염과 어장 등 수산물을 개발해 이속을 채웠다. 지금도 간혹 섬에는 '둔전리'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도시 목포생활권에서 무안생활권으로 바뀐 지도사람들이 하는 지역자랑 중에 하나가 '향교' 이야기이다. 1896년 지도군이 설치되면서 '하나의 군에 하나의 향교를 둔다'는 원칙에 따라 성균관의 주선과 지역 내 유림들의 건의로 1897년 지도항교가 건립되었다.

지도 향교는 지도읍 진산인 봉정산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대성전, 명륜당, 양사재 등이 남아 있다. 다른 지역 향교들의 역할이 약화되던 시기에 세워진 지도향교는 이미 이곳에 유배되어 지역인재를 기르던 김평묵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의 지도층을 결집하는 역할을 했다.

중암(重庵) 김평묵은 경기 포천출신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1800년대 영남지역 유생들의 위정척사 상소문에 감복하여 척양과 척왜의 소(疏)를 초안했다 왕의 노여움을 사 이곳에 유배되었다.

지도읍 두류산에 세워진 두류단에서는 매년 음력 9월 15일이면 일명 오선비(이항노, 기정진, 김평묵, 최익현, 나유영)를 모시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지금은 육로를 이용하지만 뱃길을 이용하던 한말까지 해로를 끼고 있는 지역은 육지의 다른 어떤 곳 보다 외부 와 문화 접촉이 훨씬 쉬웠고 다양했다.

여기에 육지에만 설치되던 향교가 지도에 설치되고 보니 지역유림들의 입장에서는 자긍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a 지도향교 대성전

지도향교 대성전 ⓒ 김준

지금처럼 대부분의 섬들이 철부선(차를 싣고 육지와 섬을 오가는 여객선)과 농협배들로 연결되기 전, 목포-지도-전장포-낙월도를 잇는 뱃길은 섬사람들의 애환이 스며든 길이었다.

마치 목포가 종착역인 호남선이 전라도사람들을 애환을 닮는 길이라면 이 뱃길은 섬사람들삶의 메타포라 할 것이다. 지금이야 지도에서 목포까지 뱃길이 잠깐이고, 사선으로는 담배 한참도 되지 않지만 객선을 이용하던 때에는 4시간이 걸리는 지난한 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느려터진 배는 '진달이'라 불렸던 낙월도에서 새우젓 통을 가득 싣고 힘에 겨워하며 물길을 헤치며 목포에 닿는다. 물론 임자도의 전장포에도 들려야 했다.

어쩌다 칠월칠석이나 특별한 날 임자도의 타리파시나, 칠산바다 조기잡이나 새우잡이 배들이 출어를 앞두고 큰굿이라도 크게 열리는 날이면 목포에서 구경을 하기 위해 모시적삼을 입은 구경꾼들로 배가 가득차기도 했다.

이런 굿판에 남사당패들의 놀이가 빠질 리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증도나 임자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도의 점암포구나 송도포구, 지신개를 이용해야 한다. 지도-송도-사옥도는 이미 연륙도로와 다리가 연결되어 있고 사옥도와 증도를 연결하는 도로는 지금 공사중이다.

신안의 임자도, 증도, 지도, 사옥도 일대의 주민들은 무안을 거쳐 바로 광주로 연결되는 길을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생활권을 갖는 섬을 주민들은 신안에서도 '웃섬'이라 부르고 비비금·도초·장산·하의·자은·암태·안좌 등 나머지 신안의 남부지역 섬들을 '아랫섬'으로 구분한다. 최초로 섬에 들어온 사람을 입도조라고 하는데 웃섬의 입도조들은 나주·영광·함평에서, 아랫섬은 진도·해남·영암에서 유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일까, 웃섬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내륙적 특징이, 아랫섬에 비해서 강하고 생활권도 무안과 광주권에 속한다. 섬 사람들이 구분하는 방식 속에는 육지 것들을 닮고 싶어 하는 그들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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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a 전남 신안군 지도읍 참섬의 천일염전

전남 신안군 지도읍 참섬의 천일염전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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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가난한 참섬, '돈섬(?)' 되다

지도는 말이 좋아 섬이지 '해변산중'이나 다름없었다. 유일하게 어업활동을 했던 곳을 꼽는다면 참섬 정도였다. 이곳은 방조제가 막아지기 전까지 가난을 넘어 사람살기 곤란한 섬이었다. 지금은 참섬 주민들은 간척지농지와 소금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

지도읍에서 최고의 알부자들이라는 것이 인근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참섬은 30여 가구 중 어장 일을 하는 주민이 대여섯 가구에 이른다. 이들은 병치잡이와 통발어업을 하고 있다.

10여년 전에 참도에는 10여 척의 멍텅구리배가 있었다. 멍텅구리배는 붉은 새우를 많이 잡았는데, '북새우젓'을 담거나 말려서 유통하였다.

특히 말린 붉은 새우는 농번기철에 미역국을 끊이는데 비싼 쇠고기 대신에 넣은 필수품이었다. 어촌 사람들이야 조개를 넣어 시원한 맛을 냈지만 육지에서야 마른 새우가 제격이었다.

지도읍의 호남염전, 가정염전, 조비동 염전 지역은 과거에 화염(煮鹽), 즉 소금을 구웠던 곳이다. 당시 소금을 생산하는데 가장 중히 여겼던 것은 '소'였다. 소 한 마리가 '반살림' 역할을 했다.

자염을 생산하기 위해서 갯벌을 갈고 바닷물을 붓기를 반복해야 하던 시절에 소가 하는 일은 대단했다. 그래서 소가 없는 주민들은 2~3일 가져다 쓰고 몇 사람 몫으로 일당을 쳐서 주거나 귀한 소금을 주기도 했다.

지도는 섬치고는 산이 좋고 소나무가 우거졌고, 여기에 갯벌이 좋아 전통적으로 소금생산을 많이 생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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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a 지도읍 주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했던 참섬 앞 간척농지

지도읍 주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했던 참섬 앞 간척농지 ⓒ 김준

지도는 섬의 특성을 띠지만 농업 중심의 생업구조를 갖고 있다. 쌀농사가 별 재미를 볼 수 없게 되면서 마늘과 양파 등 상업작물 의존도가 매우 높아졌으며, 경사가 급한 작은 밭도 묵히는 일이 없이 마늘과 양파가 심어졌다.

지금은 호화농장, 오룡농장, 태원농장 등 넓은 간척농지들이 조성되었지만 불과 1세기 전에만 해도 지도에는 이렇다 할 농지가 없었다. 당연히 농지가 없었으니 물길인들 있었겠는가. 당시 만들었던 크고 작은 저수지 그리고 논배미 귀퉁이에 작은 둠벙(웅덩이)들도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런 간척지들은 지도의 여러 마을들 중 봉리 쪽에 집중해 있다. 특히 서동과 참도 그리고 내양리를 연결해 만든 호화농장은 지도사람들의 식량을 해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막아진 이 방조제는 암태도의 지주 문재철이 일제로부터 300원을 지원받아 원을 막았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문씨가는 암태도에서 소금을 구워 큰돈을 벌었으며, 큰 배를 지어 인천과 군산 등으로 올라다니며 '웃다리 장사'를 하여 큰 이문을 남겼다.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웃다리 장사'란 소금을 실고 위로 올라가 팔고 내려올 때는 생필품을 갖고 와서 팔아 이중으로 돈벌이를 하는 것을 말한다.

지도에서 낙지도 잡고 숭어도 잡고, 운저리도 잡는 최고의 갯벌을 꼽으라면 '장그지 갯벌'이다. 참도의 서북쪽, 서동리 앞에는 솥섬에서 시작해 소금앞방조제까지 이어지는 갯벌이 '장그지갯벌'이다.

지도에는 금이 나왔다는 '황금리'가 있고, 그 옆에 금이 조금 나와서 붙여지 '소금출'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소금출 앞에서 솥섬에 이르는 갯벌에는 농어, 돔, 장어, 민어 등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해제와 연륙이 되고 대규모 간척지가 조성되면서 농어와 돔은 사라졌다.

변화한 환경에 잘 적응하는 숭어와 운저리는 아직도 많이 나오고 있다. 이곳 갯벌에서는 서동마을 부녀자 댓 명이 지금도 서렁게(칠게)를 잡는다. 서렁게는 1kg에 7천원정도에 팔리는데 하루나가면 10kg 내외로 잡고 있다. 서렁게는 갯벌 바닥이 말라야 하기 때문에 조금 철에 많이 잡는다.

이제는 자신있게 "봉리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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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a 참도 선착장, 건너편이 어의도.

참도 선착장, 건너편이 어의도. ⓒ 김준

a 지도읍 중심지 읍내리(이곳에서 3일과 8일 오일장이 열린다).

지도읍 중심지 읍내리(이곳에서 3일과 8일 오일장이 열린다). ⓒ 김준

간척지가 생기 전 서동사람들은 다른 지역사람들이 '어디 사세요' 라고 물으면 '뒷면사요'라고 했다.

뒷면이라 함은 지도면 뒤 갯가에 사는 사람들을 에둘러댔다. 그러던 이들이 간척농지가 생기고 나서 이제는 자신있게 '봉리살아요'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 봉리사람들은 결혼도 하기 쉬워졌다. 땅이 생기니 변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봉리는 서동(서당골)을 비롯해 참도, 심동(깊은골), 원동(원골), 봉동(봉골), 죽동(대실), 황금동 등을 묶은 행정리로 지도 북쪽에 위치한 마을들이다. 이들 마을들은 읍내와 거리가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뱃길도 불편하고 갯벌을 제외하고는 이러하다할 생업조건을 갖추지 못했던 척박한 마을들이다.

봉리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간척을 주도한 문씨가는 은인이 다름없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있음직한 공덕비를 찾기 어렵다.

서동에서 만난 주민들이 답을 알려줬다. 간척지가 조성될 무렵 봉리 일대의 땅을 갖지 못한 민초들은 물길에 드러난 땅, 즉 '똘땅'을 일궈 농사를 지었다(영산강 천변에 농사를 짓는 것 처럼). 이 땅들은 주인이 없는 땅들로 국가소유였다.

그런데 주민들도 모르는 사이에 문씨가 간척을 하면서 간척지 내부의 '똘땅'들을 자기 땅으로 전환시켜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척박한 땅을 일궈 겨우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을 뺏어갔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과도한 소작료 등으로 인해 '돈만 아는 사람에게 무슨 공덕비냐'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세워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도는 이미 1920년대 암태도와 도초도와 함께 서남해역 중 소작쟁의가 활발했던 대표적인 곳이다. 특히 지도읍 내양리는 해방을전후해 사회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으로 꼽힌다.

보릿고개 넘기 어려웠던 시절, 1번 국도에서 지도로 넘어오는 도로마냥 주민들의 가늘고 질긴 명줄을 이어줬던 것이 갯벌이었다. 갯벌을 막아 농사를 짓고, 갯벌에서 소금을 만들어 배고픔을 넘겼다. 지금도 지도사람들은 그 갯 땅을 막은 농지에 농사를 짓고, 밭에는 양파와 마늘을 심고, 소금을 일구며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라도닷컴의 '김준의 섬섬玉섬'에도 연재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라도닷컴의 '김준의 섬섬玉섬'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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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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