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꿈을 이뤘을까?

[인도네시아 귀국 이주노동자 탐방기 ①]

등록 2006.07.11 09:47수정 2006.07.1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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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로부터 과거 60년대 독일로 떠났던 파독 광부들은 '탄가루에 눈물을 적셔가며' 빵을 먹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70년대 중동신화를 창조했던 건설노동자들은 흔히 말하듯 '열사의 나라'에서 자신들의 몸을 더위에 녹여가며 조국의 기간산업 발전에 밑거름이 되는 달러를 벌어들였고, 자신들의 집안 살림과 미래를 위한 꿈을 쌓아올렸다고 들었습니다.

국가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그분들의 땀과 노력, 조국에 대한 헌신, 그리고 가족과의 이별과 온갖 위험 등의 희생을 담보한 가운데서도 이뤄낸 일들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울렁거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랬던 나라에서 '외국인 노동자'라는 말이 생겨나고, 그들을 만나는 것이 특별한 일이 되지 않게 된 지 어느덧 20년이 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외국인력 정책과 사회 인식과 관련하여 숱한 변화가 있었고, 근래에 들어서는 '이주노동자'라는 말이 보편화되면서 그들과 그 가족의 삶의 모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관심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 이주노동을 했던 이들이 귀국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해 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그들의 모습을 가까이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이주노동자의 '자발적 귀국과 사회재통합 프로그램 컨소시엄'의 지원으로 귀국 이주노동자들이나 해외 이주노동을 준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지난 2일부터 9일까지 일주일간의 일정으로 인도네시아에서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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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전 교육을 받고 있는 예비 이주노동자의 책상에 한국어 교재가 놓여있다. ⓒ 고기복

귀국 이주노동자들과의 만남 후 소회를 한마디로 적어라 한다면, 다소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꿈을 상실한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귀국한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쉽게 접촉하여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나마 나름대로 이주노동을 통해 돈도 벌고, 집도 장만하고, 사업기반도 닦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주노동의 결과가 '성공'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이주노동이 가져온 부작용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부작용 중 가장 심한 것은 '화목한 가정의 해체'였습니다. 만나본 상당수의 이주노동 경험 가족들은 '이혼', '별거', '재이주', '가정교육의 부재로 인한 자녀들의 탈선' 등을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1978년 이후 해외 이주노동이란 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도네시아의 경우 과거에는 국내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에 해당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전국적으로 400여 개의 공식적인 해외인력송출업체(PJTKI)가 성업하고 있으며, 대학을 졸업한 식자층과 중산층에서도 '너도나도' 기회가 되면 떠나고자 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실업'과 '저임금' 등의 문제가 해외 이주노동을 부추기고 있긴 하지만, 심각한 것은 해외이주노동을 떠났던 이들에 의한 해외 이주노동의 '재창출'이 그런 경향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이주여성의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썼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드위 앙그라에니(Dewi Anggraeni)는 "홍콩에서 가정부 등의 이주노동 경험을 갖고 있는 여성이 귀국하고 지역사회에 재정착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뒤를 이어 이주노동을 떠날 이들을 모집하는 '스폰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며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출국 전 교육을 시키고, 모집된 이들을 PJKTI에 소개하는 일들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해외 이주노동은 인도네시아 전국적으로 성행하며 특별한 남의 일이 아닌 '나'의 문제로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도 다가가고 있습니다. 특히 산업 기반이 없는 농어촌 지역의 20대 초반 여성들은 하릴없이 해외 이주노동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화목한 가정의 해체'는 그런 문제로 인해 나타난 결과입니다.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는 어느 촌로의 말을 떠올리다 보면 가슴을 치게 합니다.

좀 과장된 듯 말하는 그 촌로는 '한 집 건너 한 사람'이 이주노동을 한다는 중부자바 스마랑(Semarang)의 끈달(Kendal)면 소재지에서 승용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즈삐링(Jepiring)'에서 담배농사와 소장사를 하며 12남매를 키운 어르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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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남매를 뒀다는 어르신과 함께. ⓒ 고기복

부인이 셋인 독실한 무슬림인 그 촌로는 12남매 가운데 위로부터 넷을 해외 이주노동자로 떠나보냈던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해외 이주노동을 떠나지 못해 안달이 난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는 이주노동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자식들이 부모의 품을 떠나 고생하는 것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부모의 품을 떠난 자식들이 부모가 나고 자란 지역의 문화와 멀리 떨어지는 것이 안타까웠고 이를 해마다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식들만이 아니라 주위의 젊은 사람들이 해외 이주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가치들을 버리고 있다고 탄식했습니다.

"우리는 옆집 처자와 눈만 마주쳐도 일이 잘못되어 소문나면 결혼하고 살림 채려야 했어. 그런데 요즘 애들은 고등학교도 나기(졸업하기) 전에 애를 갖고, 그 애를 훌렁 할미, 할애비 무릎에 던져놓고 외국에 가 버려. 그놈(떠난 자식)의 자식들이 돈 번다고 하지만, 자식(남은 손자손녀)들 뒷바라지가 그렇게 쉬운가? 자식 교육은 부모가 하는 것이여."

제가 인도네시아 곳곳에서 만난 '이주노동'을 떠나고자 준비하는 이들은 '꿈'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돈'을 찾아 떠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꿈'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보다 '돈'에 집착하는 모습에 탄식하는 것은 손자손녀들을 자식들과 함께 무릎에서 키우고 싶었다던 한 촌로의 마음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땅에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있듯이 성공도 실패도 가족과 함께 할 때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제가 '꿈'을 쫓는 이상주의자라서 그럴까요?

(* 다음 기사에서는 해외 이주노동의 빛과 그늘을 보여주었던 세 명의 젊은이들을 만나본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드위 앙그라에니(Dewi Anggraeni)는 <꿈을 찾는 사람들(Dreamseekers, 2006)-아시아지역 가정부로서의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저자입니다.

덧붙이는 글 드위 앙그라에니(Dewi Anggraeni)는 <꿈을 찾는 사람들(Dreamseekers, 2006)-아시아지역 가정부로서의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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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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