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없는 출구를 바라보는 암라와띠의 슬픔

[인도네시아 귀국 이주노동자 탐방기 ②]

등록 2006.07.12 09:09수정 2006.07.13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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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익 삐이익."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와르뗄(Wartel, 전화방)에 들어서자, 책상 위에서 열심히 뭔가를 적는 듯한 여자는 손님이 오는지 마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전화를 마친 손님이 얼마냐고 묻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몇 마디하고는 다시 책상 위에 놓인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하더군요. 그게 뭔지 궁금해 가까이 가서 뭘 하고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녀요."

와르뗄을 보고 있던 암라와띠(Amrawati)가 수줍은 듯 피식 웃으며 손으로 가린 것은 빨간 볼펜으로 알파벳 철자 중 동그란 모양이 있는 곳마다 줄을 그어놓은 것이었습니다. 가령, 영문자 'O'라는 철자가 있으면 그 안에 빨간 색으로 줄을 그으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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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르뗄(전화방)에서 책상에 앉아 있는 암라와띠 ⓒ 고기복

암라와띠(25)는 인도네시아 서부 누사떵가라(Nusa Tenggara Barat)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경찰을 꿈꾸었던 활발한 성격의 여성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찰 시험을 준비하기에 앞서 스마랑(Semarang)에 잠시 머물던 그녀가 어릴 적 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우연히 접한 인도네시아에서 PJKTKI라 불리는 해외인력송출업체의 유혹이었습니다.

암라와띠는 당시 지금 일하고 있는 와르뗄에서 네 개의 점포만 건너면 자리 잡고 있는 곳에서 '말레이시아'로 떠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선뜻 2년간의 해외이주노동 계약을 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녀가 그토록 쉽게 계약에 동의를 했던 이유는 일단, 송출과정에 드는 일체의 비용을 송출회사에서 선부담하고, 말레이시아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조금씩 그 비용을 갚아나가면 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게다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문화적으로, 특히 언어에 있어서 상당히 비슷한 면이 많아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보다 12년 먼저 독립을 했지만, 현재 국제사회의 정치 경제적 위상은 말레이시아에 훨씬 미치지 못합니다. 말레이시아의 고도성장은 실업률이 10%를 넘는 인도네시아로부터의 이주노동자 대량 유입을 초래했고, 상당수는 미등록상태로 일을 한다고 합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로부터의 이주는 교사와 의사와 같은 전문 직종의 사람들로 말레이 지역 사회에 적극적이고 빨리 융화되었다고 합니다. 반면 최근의 이주노동자들은 건설업이나 가정부 등이 주류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은 주로 건설업에 종사하는 반면, 여성들은 주로 가사 노동에 종사하는데, 2005년까지 22만 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암라와띠는 일반의 인도네시아 이주여성들이 그러하듯 말레이시아에서 2년간 가정부로 일을 한 후 귀향했습니다. 2년 동안 맏딸인 그녀가 번 돈은 동생들 학비를 대기에도 빠듯했고 큰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귀국 후 곧바로 결혼을 하여 고향에 정착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첫애를 낳고 1년을 집에서 보냈던 암라와띠는 다시 한 번 말레이시아로 떠나 만 2년을 가정부로 생활했습니다. 그때부터 암라와띠의 더욱 고단한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출국한 후 꼬박 꼬박 남편에게 돈을 보냈지만, 남편은 아무런 연락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1년이 지날 때쯤 해서 송금을 중단하였지만 역시 소식이 없었습니다. 귀국 후 만난 남편은 이미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심한 그녀는 고향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다시 스마랑으로 갔습니다. 말레이시아로 다시 갈 작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송출회사에서는 4년을 해외에서 일했던 암라와띠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출국 준비가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신체검사 결과 임신 중인 것으로 드러나 송출 계약을 취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신 1개월. 불행하게도 바람난 남편의 아이를 다시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배가 불러올 때까지 스마랑의 어느 점포에서 점원 노릇을 하다가 송출회사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러나 송출회사에서는 근로계약을 취소하느라 손해가 많다며 암라와띠를 문전박대 하고 쫓아내었습니다. 그때 도움을 줬던 사람이 와르뗄 주인이었습니다.

와르뗄 주인 역시 해외이주노동을 했던 경험이 있었고, 이혼의 아픔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암라와띠에게 '집에 갈 돈이 없으면 비행기 값에 목돈이라도 얹어 주겠으니 고향에 돌아가서 아이를 잘 양육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귀향할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해산하자마자, 아이를 입양시설에 맡기고는 인력송출회사 사무실 문턱이 닿도록 아침마다 인사하듯 들락거렸지만, 한 번 퇴짜를 맞았던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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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인력송출회사 문을 나서는 암라와띠 ⓒ 고기복

벌써 석 달째 인력송출회사의 동의를 구하고 있지만, 쉽게 허락이 떨어질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와르뗄 주인 헨니(Henny)의 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외이주노동을 떠나기로 작정한 암라와띠의 마음이 쉽게 돌아설 것 같지도 않아 보였습니다. 그녀에게 이제 '이주노동'은 자식마저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단 하나의 출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출구가 큰돈을 안겨준다는 보장도 없고, 행복한 미래를 보장한다는 담보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런 암라와띠를 보며 답답한 마음에 헨니가 말을 합니다.

"말레이시아에 서방이나 보내지. 왜 자꾸 가려고 그래."

희망없는 출구를 바라보는 이의 슬픔을 겪어봤던 헨니는 죽도록 고생하고 돌아온 것이 무엇인지 직시하지 못하는 암라와띠가 못내 안쓰러운 듯 혀를 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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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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