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총이다!"

[내 젊음을 바친 군대 4] 소총에는 조국과 민족이 있다

등록 2006.08.17 17:01수정 2006.08.1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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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 되면 누구나 자기의 총을 가지게 된다. 대포를 쏘는 일을 맡고 있는 포병들도 개인 화기인 소총은 별도로 지니게 되어 있다.


내가 사관생도가 되어 처음으로 M-1소총을 받았을 때, 착잡하고 무거운 긴장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짐승을 사냥하기 위한 것이나 스포츠용이 아닌, 필요시 순전히 사람을 향해 쏘기 위해서 주어진 무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덜컹했다.

이 총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졌을까? 또 장차 얼마나 많은 어떤 사람들이 이 총에 의해 죽어갈 것인가를 생각하니 마음이 꺼림직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계속해서 "소총은 제2의 생명이다"를 듣고 들으며, '병기 애호의 노래'를 수도 없이 불렀다. 그리고 시간 나는 대로 만지며 닦고,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다 보니, 차차 정이 들기 시작하여 마침내 나의 분신처럼 느끼게 되었다. 소총이 나의 '제2의 생명'임은 1965년 월남의 정글을 누비던 수많은 전투에서 체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자기의 소총을 '얼마만큼 깊은 애정을 가지고 대하고 있느냐'는 느낌의 수준이 바로 군인 됨의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기초 군사훈련 과정이 끝나고, 정상적인 대학교육을 받는 생도 생활이 시작되자 일개월에 한 번의 외출도 나갈 수 있었다. 우리가 기거하는 내무반은 중앙난방 시스템이었으며, 세면장과 책상, 옷장, 침대 등 당시로써 초현대식으로 돼 있었다. 군은 이를 자랑하기 위해 휴일 면회를 온 가족들에게 내무반 견학을 허락했다.


나와 같은 내무반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장OO 생도의 집안 식구들이 면회를 왔다. 장 생도의 부모님은 내무반에 들어와서 맨 먼저 총대에 세워져 있는 M-1소총을 보시더니 "야! OO이 총이구나! 멋있다!"라며 만면에 웃음 띤 얼굴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아들을 대견해 하셨다. 두 여동생들도 "오빠 총이다!"라고 함성을 지르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리 저리 만져 보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 껑충 껑충 뛰지 않는가! 만일 내 여동생들과 부모님께서 면회 오셨다면 어떠하였을까? 아마 소총이 무서워서 그 쪽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소름 끼치듯 표정이 어두워졌을 것이다.


장 생도는 나처럼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고, 외아들이지만 진정 군대가 좋아서 육사를 택했다. 정말 군인이 적성에 맞는 멋있는 분이었다. 그는 특별히 웅변에 능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생회 회장으로 맹활약할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그의 말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그는 생각의 폭과 선이 굵고 대범했다. 그야말로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나는 생도시절부터 그의 의연한 성품과 기질로 볼 때 장차 틀림없이 우리 군의 기둥으로 크게 성장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일본 조도전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나가셨다. 그의 어머니는 북경 여자 사범대학을 나오신 인텔리였다. 당시 대개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장 생도의 부모님은 일본 육사를 연상하며 사관학교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던 것 같다.

특히 어머니께서 일본에 계실 때 사관학교 근방에서 사셨는데, 생도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고 한다. 장 생도는 육사가 너무 좋아서 1년 재수의 도전 끝에 사관생도가 되었다.

그는 나처럼 이과(理科)중심으로 되어 있는 학과 공부에는 별 관심과 흥미가 없었다. 더 높고 큰 곳에 꿈을 두고 호연지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당시 영어, 수학이나 물리, 화학과 달리 '도학(圖學)'이라는 과목은 생도들 모두가 별로 중요하지 취급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에 분개한 도학 교수들이 생도들을 혼내 본때를 보이려고 고의로 기말시험을 아주 어렵게 출제했다. 이를 너무 소홀히 하였다가 장 생도는 그만 과락을 당하여 유급을 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4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나보다 1년 늦게 19기로 임관했다.

위관 장교시절 우리는 서로 너무 바쁘다 보니 소식이 끊겼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장 소위의 부모님을 뵌 적이 있다. 그때 아버님의 표정은 그전과 달리 많이 어두워 보이셨다. 아들을 사관학교에 보낸 것을 크게 실망하고 계셨다. 차라리 사업을 시킬 것을 후회막급하다고 하셨다. 그후 가족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장 소위도 제대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무엇이 그 분들을 그토록 실망하도록 만들었을까? 어느 누구보다 군 간부로서 크게 성장할 분이었는데…. 나는 장 생도 가족이 처음 내무반 견학을 왔을 때 M-1 소총을 보면서 너무나 좋아하시던 모습이 자꾸 눈에 떠올랐다.

군인이 소총을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마음 자세로 소총을 대하고 사용해야 할 것인가와 같은 목적 가치를 분명히 교육해야 한다. 이는 소총의 기능적 특징 설명 수준인 "소총은 제2생명이다" 같은 수단적 가치보다 훨씬 중요할 것이다. 한 자루의 소총에도 조국과 민족을 뜨겁게 느끼고 볼 수 있도록 의식의 수준을 높여 가는 간부 교육을 해야할 것이다.

장 생도의 부모님들이 소총을 보며 기뻐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장 소위가 임관하여 성장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그가 총을 쏠 줄 아는 한 사람의 전투원 수준 이상으로 생각의 폭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을지 모른다. 특히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우리 군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던 것 같다.

장 생도 부모님의 판단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은 그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는 동안 분명하게 확인하였을 것이다. 권력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찬탈하려고 광주민주화 항쟁 당시 비무장한 시민을 향해 국민이 맡겨준 신성한 소총을 쏘도록 하는 엄청난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었을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무서운 죄악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아들이 그런 군을 빨리 떠나기를 잘했다고 여기고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군인이 최초로 소총을 지급 받을 때는 일평생 잊을 수 없는 뜨거운 감동으로 대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된 교육이 필요하다. 국민이 우리를 믿고 맡겨준 소총을 불의(不義)한 야심가들에게 이용당하여 그릇된 목적에 사용됐을 때, 범죄자의 사나운 흉기가 되어 민족과 역사 앞에 큰 죄인이 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일러주었어야 했다.

오직 '천황을 위하여!'로 세뇌되어 병들어 있던 친일분자들로서는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으로 소총을 갖는 의미를 설명하기 쑥스러웠을지 모른다. 이제 우리들의 후배들에게 소총에 깃들어 있는 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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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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