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병에게 대변 먹인 간부가 생긴 까닭

[내 젊음을 바친 군대 5] 귀관들은 국제 신사다

등록 2006.08.23 16:56수정 2006.08.23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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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생도 시절, 분대원들과 함께(뒷줄 맨 왼쪽이 필자).

생도 시절, 분대원들과 함께(뒷줄 맨 왼쪽이 필자).

"귀관들은 국제 신사다! 구라파의 각국 대표 귀부인들이 영국 런던에 모여서 회의했다. 지금 즉시 각 나라에서 몇 명씩 신사를 차출해 세계 신사 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각 나라에서 누구를 뽑아 보내겠는가? 신체 건강하고 실력 있고 사상 건전한 사관생도가 아니겠는가? 사관생도는 국제신사다!"


우리에게 거창하게 늘어놓는 중대장 생도의 목소리에는 유달리 힘이 들어 있었다. 신사답게, 의연하게 연설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

그러나 신사다움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각론은 기대와 너무 달랐다. 중대장 생도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을 늘어놓는 모습에 우리는 크게 실망했다.

기껏해야 "여자와 함께 길을 갈 때는 차가 다니는 위험한 쪽으로 걸어라", "택시를 잡았을 때는 숙녀를 먼저 태워야 한다", "양식을 먹을 때 포크와 나이프는 이렇게 사용해라", "삼류 극장 앞엔 얼씬거리지도 마라",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더라도 포장마차 앞에서 서성거리거나 들어가서는 안 된다", "여자가 앉기 전에 먼저 앉지 말라", "낯설고 위험한 곳에 들어갈 때는 앞장서라" 등 주로 숙녀와 함께 할 때 유의해야 할 자세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상상으로 그리며 힘줘 말한 선배들이 생각한 신사의 개념은 돈과 권력을 거머쥐고, 세련되고 품위 있는 매너를 갖춘 중세 유럽의 귀족 정도였던 것 같다. 정신은 온통 군국주의 일본시대의 권위주의적 사고에 가득 차 있으면서, 겉모습은 서구의 기사도를 생각한 셈이다.

정신은 군국주의, 외양은 서구 흉내... 친일파 일색 군대의 부정적 유산


신사의 참모습이 부귀영화를 휘어잡아 누리는 여유에서 풍겨 나올 수 있는 거만한 것이라는데 나는 마음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힘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억울한 자들, 정의를 부르짖다 옥에 갇힌 자들을 동정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가 바로 참신사의 모습 아닌가?

탐욕과 이기적 영달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함,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 정의감과 도덕적 용기, 이타적인 삶의 자세 등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내용도 많지 않은가. 불의가 판을 치는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타파해야 하는 절실한 내용도 참으로 많으련만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군을 이끌던 지도층이 친일파 일색이었으니, 군대 문화와 정신도 구 일본군대의 것을 이상형으로 설정하고 이를 답습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친일파 출신 군 지도층은 민족을 멸시하는 식민사관에 완전히 찌들도록 간부들을 세뇌해 민족자주 정신이 전혀 없는 군대로 만들었다. 군 출신 중 민족의식이 없고 반통일적인 인사들이 지금까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군대에서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들어 있는 신사도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돈과 출세를 낚싯밥으로 내걸고 높은 이상과 꿈을 품지 못하게 하는 한편, 겉모습만 서구 선진국을 흉내내라고 강조할 뿐이었다.

선배들이 기초군사 훈련을 받았을 때는 물론, 그 선배들의 선배들도 그런 썩은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군대란 본래 그런가 보다'하며 계속 전해 내려온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생도 훈육을 처음 시작했을 때 뿌린 씨 그대로 계속 반복해서 이어지고 있다.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는데도.

민족정기를 지키고 이어갈 동량을 양성한다는 뚜렷한 철학과 신념,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자부심 없이 기계적으로 전투에만 능한 소대장을 양성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생도 훈육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 민족혼도, 역사의식도 없고 일본 군대가 남긴 살벌한 언어를 사용하며 훈련병에게 대변을 먹이는 얼빠진 군대가 된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이라고 하지만, 군 간부양성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혼과 멋스러움을 담은 신사의 모습은 군 지도층의 안중에 없었다. 민족적 자존심 자체를 폄하하는 데 기를 쓰며 앞장서 온 세력이 군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선비정신', '풍류도', '두레정신' 등 인간미 넘치는 고결한 삶의 모습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으련만 실상은 그와 전혀 달랐다.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홍익인간'에 담긴 위대한 인류애에 대해, 혹은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동학농민군의 천하 박애 정신 등을 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일분자들이 걸어온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훈육 과정에서 민족의 지도자로서 닦고 쌓아야 할 정신적 자세는 제대로 다뤄질 수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군 간부 양성 과정의 이러한 문제점이 아직도 그대로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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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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