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는 현세의 시름을 자연에서 풀었을까?

[녹색의 장원 녹우당 15] 고산문학을 잉태한 원림지 수정동

등록 2006.08.23 09:56수정 2006.08.2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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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수정동에 남아있는 당시의 건물지 흔적들.

수정동에 남아있는 당시의 건물지 흔적들. ⓒ 정윤섭

녹우당 해남 윤씨가에서 고산 윤선도 대는 해남 윤씨가의 가업이 최고의 중흥을 이루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어초은 윤효정이 녹우당에 터를 잡고 재지 사족(사대부)으로서, 자리를 확고하게 자리 잡아간 이래 윤효정의 5대손인 고산 윤선도라는 걸출한 인물이 출현한다.

고산의 정치적인 관직은 그리 높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문학적 위치만큼이나 정치적 역경이나 문화 예술의 자취가 해남 윤씨가의 가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녹우당 해남 윤씨가는 어초은 윤효정 이후 호남 3걸인 윤구를 비롯한 많은 인물이 사림 정치기에 관직에 진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 인물은 이후 '사화'라는 정치적 변혁기 속에서 서울(한양)로 출사나 낙향을 반복하게 된다. 관직에 오르게 되는 것과 '사화'로 인한 유배나 은둔이 반복되면서 소위 서울과 지방(녹우당)의 생활이 교차하게 되는 것이다.

해남 윤씨가의 종택인 녹우당을 기준으로 본다면 해남 윤씨가의 인물들은 어초은 윤효정 때부터 서울로 진출을 통해 수시로 서울과 종가의 왕래가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근·현대까지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종가의 전통이나 권위가 지켜지는 것은 관직으로의 진출이라는 것이 기본이 되고 있는 조선시대의 관료사회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서울로 상징되는 중앙의 사회에 진출 사대부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해남 윤씨가의 명맥이 가장 확고하게 나타난 때가 고산 윤선도 대이다. 그의 문학적 위치만큼이나 정치, 문화적으로 고산 윤선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아마도 500년의 가업 속에서 문화, 정치적으로 가장 중흥의 시대를 구가한 것이 고산이 남긴 자취일 것이다.

고산은 문학인이자 정치, 예술, 학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취를 남기고 있어 그에 대한 비중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녹우당은 500년 해남 윤씨가의 역사가 이어진 곳이지만 고산유적지로 더 알려진 것처럼 집안을 부각시키는데, 한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 고산의 작품이 연상되는 수정굴.

고산의 작품이 연상되는 수정굴. ⓒ 정윤섭

고산 윤선도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녹우당 해남 윤씨가 이야기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넓고 다양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우선 고산의 흔적(유허지)을 찾아 가장 먼저 그가 조영한 원림지이자 그의 은둔처이며 문학의 산실인 '수정동'을 찾아나서기로 한다.


여름이면 해남 윤씨가의 종택인 녹우당은 관광객들의 물결로 넘친다. 그런데 녹우당을 찾는 사람들 중엔 '수정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녹색의 장원이라 일컫는 녹우당을 비롯한 금쇄동, 완도 보길도 세연정은 고산이 조영한 대표적인 원림지라 할 수 있다. 금쇄동과 함께 산중에 자리하고 있는 수정동은 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은둔처에 마련한 원림 수정동


a 바람에 날리는 수정동 비폭의 모습이 멋스럽다.

바람에 날리는 수정동 비폭의 모습이 멋스럽다. ⓒ 정윤섭

수정동을 비롯하여 금쇄동으로 대표되는 이곳의 '수정동', '문소동', '금쇄동'은 소위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한다. 보통은 금쇄동으로 불리는 이곳 일동삼승의 영역에 고산이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 수정동이다.

이곳은 고산이 기유년 53세가 되던 2월 경상도 영덕의 귀양살이에서 풀리어 해남 연동의 종가에 돌아온 후 산거생활(山居生活)을 위해 처음 찾은 곳이다. 수정동은 금쇄동과 함께 고산의 대표작인 '산중신곡'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수정동은 약간 금기의 구역이 되어있다. 거대한 석산을 개발하는 회사가 가로막고 그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절히 방문목적을 잘 설명해야 한다. 이곳의 좁은 계곡을 따라 오르면 작은 계곡(실개천)을 이용하여 조영한 흔적들이 나타나는데, 집을 짓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허물어진 축대나 정자, 연못 등이 남아있다.

고산은 왜 하필이면 이 산중에 들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을까. 당시의 시대로 가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지금 이런 산중이나 산꼭대기에 자신의 생활공간을 마련한 것을 보면 성서의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만큼이나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아마 그의 정치적 역정, 그리고 국부(國富)라 불리는 그의 경제적 능력 등이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해남읍 녹우당 종가를 지나 대흥사로 막 들어서기 전 오른편으로 금쇄동 가는 안내판이 서 있다. 지금은 잘 포장된 길이지만 첩첩산중으로 가는 산길의 초입이다. 이런 길을 아마 고산은 나귀를 타고 시종을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면서 들어간다.

조선 시조 문학의 최고로 일컫고 있는 고산 윤선도의 문학처 '수정동'을 찾는 길은 쉽지 않다. 더운 열기의 뙤약볕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시원한 강가에 정자라도 있는 곳이라면 더 나을 것이지만 땀을 흠씬 적시는 산길을 걸을 각오를 해야 한다.

여행이라는 것이 편하고 안락함만이 기억에 남지 않듯이 그 의미를 느끼고자 한다면 때론 어느 정도의 고생도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 충실한 현지 가이드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찾기가 쉽지 않아 어떤 때는 헤매면서 투덜대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고산 윤선도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사람만 찾는 길이기도 하다.

항상 고산의 유허지를 보면서 생각되는 부분이지만 수정동이나 금쇄동을 보면 고산은 어떻게 해서 이런 천혜의 장소를 찾게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나중에는 그것이 풍수지리에 밝은 고산의 높은 예지력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수정동 원림

고산의 삶을 보면 그의 정치적 역정이 파란만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인생의 절반이 유배와 은둔의 시간으로 보내질 만큼 평범한 삶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의 문학이나 그가 조영한 원림은 그의 이러한 파란 많은 인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고산이 처음 은둔처로 정한 수정동은 현산면 만안리 미세마을 건너편 만안저수지 위쪽 골짜기에 있는 계곡이다. 지금 이곳은 바위산을 깨 건축자재로 쓰기 위한 채석장으로 변해 일반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채석장을 지나 조그마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비가 올 때나 흐르는 실개천이 나오고 이 실개천을 이용하여 고산이 조영한 수정동 유적이 나온다.

병풍바위 바로 아래에는 축대 중 가장 큰 규모인 높이 약 3m, 길이 10m가량의 정자 터가 있으며, 여기저기 기와 파편들이 흩어져 있어 기와를 얹은 정자 터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해준다.

a 장마뒤면 장관인 수정동 병풍바위 폭포.

장마뒤면 장관인 수정동 병풍바위 폭포. ⓒ 정윤섭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멋진 자연의 일부는 높이 약 10m, 길이 50m가량의 병풍바위다. 병풍처럼 길게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며, 이곳 병풍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비폭이 되어 흐르고 있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그 수량이 적어 그 맛을 느끼기 어렵지만 비가 오면 병풍바위에서 떨어지는 비폭을 바라보며 시상에 잠겼을 고산을 생각하면 그의 낭만적인 조영 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a 비폭에서 떨어지는 물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비폭에서 떨어지는 물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 정윤섭

이 비폭에서 부근 마을 사람들이 유두날 물을 맞았다고 하며 물을 맞을 때 마음씨가 나쁜 사람은 구렁이가 물을 막아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전설을 통해 추측해 보건대 이것은 병풍바위 위에 만들어 놓은 연못의 수위를 조절하여 물을 흘러내린 것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가 생겨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병풍바위 왼편으로 따라 올라가면 조그마한 동굴이 나온다. 천연굴로 보이며 아주 옛날에는 호랑이도 살았다고 한다. 이 동굴은 산중신곡의 '일모요(日暮謠)'에 나오는 '아희야 범 무서운데 밖에 나다니지 말아라'고 한 고산의 심정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조금 더 위쪽에는 무성한 덤불 숲 속에 축대를 쌓아 만든 연못이 있다. 연못의 흔적이 아직도 확연하게 남아있는 이곳에 갈대와 잡풀만 무성하다.

이곳 수정동은 금쇄동이나 보길도에 비해 그 조영된 규모나 모습이 작지만 좁은 계곡 속에 조영된 것들은 차라리 아기자기한 느낌마저 든다. 어쩌면 금쇄동이나 보길도의 원림을 조영하기 위한 실험처처럼.

고산은 자신의 은둔생활을 철저히 자연 속에 몰입시킨다. 자신의 정치적 소외감을 자연 속에서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연으로의 도피로도 생각할 수 있으나 그가 은둔지에서 만들어 놓은 원림의 흔적들은 그가 단순히 자연 속에 묻혀 지낸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a 고산의 오우가에 등장하는 오죽.

고산의 오우가에 등장하는 오죽. ⓒ 정윤섭

한편으로 이러한 원림의 모습들은 호사스러운 면도 있으며, 당시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양반계급으로서의 경제적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그의 넓은 안목은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산이 자연과의 친화 속에서 조영한 원림은 지금 조경이라는 견지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의 근거지였던 연동에 조영한 원림은 물론 그의 첫 은둔처였던 수정동,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세계 속에 조영한 금쇄동, 그리고 하나의 완성과도 같았던 보길도 세연정은 많은 사람에게 당시 사람들의 자연사상을 알 수 있게 하는 고산의 원림지다.

풍수지리에도 능통했다고 하는 고산은 풍광이 뛰어난 이러한 자연을 발견하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속으로

덧붙이는 글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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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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