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0회

등록 2006.08.28 08:11수정 2006.08.28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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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갑자기 얼어붙은 듯했다.

"나를 모욕한다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보주를 모욕한다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아주 충실한 개로군."

풍철한이 입술을 말아 올리며 비웃듯 막말을 뱉었다. 이미 그 역시 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만이 많은 그였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들어와 보니 흉수를 찾아 달라고 부탁 아닌 명령을 하더니 오일이란 짧은 기간을 주고 찾아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상대가 운중보주라서 화를 터트릴 상황은 아니었지만 오일 안에 찾지 못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누구에게 매이길 싫어하는 풍철한으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헌데 보이는 그대로 말을 했는데 창끝으로 자신의 목줄기를 꿰뚫으려 들어?

풍철한의 말을 들은 함곡과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이 침중하고 심각하게 변했다. 무적신창 좌등에게 한 말은 모욕 중의 모욕이었다. 당장이라도 풍철한의 목젖이 꿰뚫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무적신창은 참고 있었다. 얼굴 근육이 뒤틀리며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 때였다. 함곡이 왼손을 치켜들어 풍철한의 목젖에 닿아있는 창에 갖다댔다. 그 손에는 용봉쌍비 중 봉비가 들려 있었다.


"좌대협. 치우시오."

함곡의 어조는 낮았다. 하지만 그 역시 화를 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보주께 모든 권한을 부여 받았소. 좌대협의 생사여탈도 아마 거기에 해당될 거요. 더구나 지금 좌대협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 보았소?"

좌등의 눈가에 심하게 잔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꽉 다문 그의 입술이 비틀리고 있었다. 자신의 창끝에 보주의 신물인 용봉쌍비를 갖다 댄 것은 아주 명백한 의사표시였다. 보주 외에는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은 좌등이었지만 보주의 신물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함곡의 지적은 너무나 예리했다. 그가 보주를 감싸고돌수록 의심은 더욱 커질 수 있었다. 냉정하게 본다면 풍철한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이곳을 맨 처음 조사할 때에도 너무나 명백해서 오히려 당황했었다.

사인은 분명히 심인검(心印劍)이었다. 보주가 마음만 먹으면 이 중원 누구라도 피할 수 없다는 심검. 철담의 미간에 난 혈흔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고, 극상승의 경지에 오른 심인검만이 남길 수 있는 단 한 방울 흘러내린 핏방울도 그것을 입증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보주의 심인검이 아니라면 어찌 저런 혈흔을 낼 수 있는가?

더구나 상대는 철담 하후진이었다. 하후진의 처소에 드나들 수 있고, 마주 앉아 차를 나눌 정도의 인물이라면 손에 꼽을 정도. 하후진이 손을 쓰지 못하고 죽을 정도라면 오직 보주 뿐. 하지만 좌등은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철담 하후진이 죽었을 것이라 예상되었던 시각에 보주는 분명 손님들과 담소 중이었고, 자신 역시 문 앞에서 지키고 있지 않았던가?

"……!"

그는 풍철한을 바라보았다. 철골호담(鐵骨虎膽)의 호한(好漢)이 분명했다. 창끝이 자신의 목줄을 파고들고 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렇듯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더구나 잠시 보이던 기세는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는 미련 없이 창을 치웠다.

"못난 모습을 보였소. 풍대협께서는 좌모를 용서하시오."

순간적이었다. 무적신창 좌등은 후배인 풍철한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사과했다. 그런 모습은 아무나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을, 노기도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더구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그 모습에 정작 당황한 것은 풍철한이었다.

'사내다. 진짜 사내다.'

상대가 그렇게 나온 것은 자신이 무심코 했던 말 때문이었다. 신경이 곤두서 있는 좌등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뒤에 보인 자신의 태도는 선배에게 할 수 없는 매우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과를 하는 것이다. 저런 사내는 이 무림에 많지 않다. 풍철한은 황급히, 그리고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아니외다. 이 후배가 잘못했소. 너그럽게 용서하시길…."

그 역시 사내였다.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그 역시 자신의 잘못을 명백히 인정했다. 언뜻 좌등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 역시 풍철한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해주어야 했다.

"분명한 사실은 보주님이 흉수가 될 수 없다는 점이오. 성곤(聖棍) 어른께서 들른 그 시각부터 보주님께서는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으시고 손님과 담소 중이었소. 더구나 성곤 어르신은 이곳에서 철담 어른을 만나신 후 곧 바로 운중각으로 가셔서 보주님과 같이 술을 드셨기 때문에 잠시의 틈도 없었소."

좌등은 자신이 직접 본 것이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보주를 애써 감싸주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을 보았던 사람은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금방 확인하면 밝혀질 일을 거짓말 할 이유는 없었다. 함곡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보주의 행적은 너무나 분명했다.

"또 한 가지… 이 현장에서는 보주가 아니라는 증거가 있네."

함곡이 좌등의 말에 동조했다.

"무슨 증거를 말하는 것인가?"

"자… 보게나. 분명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지. 헌데 철담 어른은 상석(上席)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살해되셨네. 철담 어른은 언제나 이인자의 위치에서 친구였다지만 보주에 대해 깍듯한 예의를 지켰던 분이라고 들었네. 물론 이곳이 자신의 거처이고, 친구 사이라 하지만 보주께서 이곳에 오셨다면 바꿔 앉지 않았을까?"

함곡은 말을 하면서 시선을 좌등에게 돌렸다. 그것은 자신의 추측에 대해 의견을 묻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좌등이 대답했다.

"철담 어른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보주께서 자리에 앉고 나서야 앉으시는 분이셨소. 그러지 말라고 항시 보주께서 말씀하셨지만 한 번도 보주보다 상석에 앉으시는 것을 본 적이 없소."

"철담 어른은 글을 쓰고 있는 상태였네."

풍철한이 이의를 제기했다. 글을 쓰고 있었다면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그런 가정도 배제할 수는 없네."

함곡은 굳이 풍철한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운중보였다. 운중보 내에서는 어디를 가나 상석에 앉는 사람은 보주였다. 더구나 운중보주가 이곳에 들어왔다면 친구라 해도 철담은 일어났을 것이다. 일어난 상태에서 누군지 알면서도 다시 그 자리에 주저 않았을까?

풍철한 역시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는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정이 틀렸다는 의미로 보였다.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시선을 함곡에게 돌렸다. 이제 일단 둘러보았으니 나가자는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자네는…."

풍철한이 함곡에게 말을 채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풍철한은 또 한 번 날벼락을 맞았다.

쨕---!

경쾌한 소리와 함께 풍철한의 왼 뺨에 하얀 손이 작렬했다. 함곡의 동생인 선화란 여인의 손이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고, 너무나 빨라 자세히 본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당신의 무례한 태도는 아직까지 변하지 않았군요. 언제까지 그러는지 지켜볼 거예요."

본래부터 냉기가 감도는 여인의 입에서 서리가 내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장내가 얼어붙은 듯했다. 아마 조금 전 풍철한이 무례하게 함곡을 향해 소리 지른 일 때문에 뺨을 때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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