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다섯 장 뿐인 수제 명함

한 평 반의 평화 아홉째 이야기

등록 2006.09.01 11:12수정 2006.09.0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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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름다운(?) 내 밥벌이의 현장

아름다운(?) 내 밥벌이의 현장 ⓒ 김수자

“사무실이 정말 근사하네요, 전망도 좋고.”

손님은 사무실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립니다. 때마침 넓은 통유리창으로 노을 지는 저녁 풍경이 펼쳐집니다. 손님의 눈에 부러움이 실립니다.


“보기보다 좋진 않아요. 해가 비치면 덥기도 하고요.”
“아유, 저희 사무실은 반지하라 햇빛이 들면 고맙지요.”

딴엔 겸사라고 늘어놓은 말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입니다. 그저, 참 고맙고 다행한 일이지요, 하면 되었을 것을.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와 방금 받은 명함을 명함꽂이에 넣습니다. 그리고 손님의 감탄을 자아내던 너른 책상과 그 위에 놓인 노트북 컴퓨터, 잘 짜인 책장과 인체공학적으로 디자인된 최신형 의자, 바깥의 풍경을 고스란히 전하는 커다란 유리창과 푸른 잎이 시원한 키 큰 화분까지, 사무실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봅니다.

'넓고 근사한 사무실이구나.'

타인의 시선이 지나간 뒤여선지, 새삼스런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생각해보니 오래 전 이런 사무실을 꿈꾼 적이 있었습니다. 타인의 공간일 때 그리도 멀고 아득한 것이, 어느새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장소가 되었구나. 낯이 붉어집니다.

꽤 오래 전 일입니다. 백화점 앞 벤치에 앉아 사람을 기다리다가 십여 년 만에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이름도 추억도 피차 가물가물했지만, 예절 바른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며, “너는?” 하고 내 얼굴과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난, 명함이 없어."


어색하고 미안하고 민망했습니다. 이따금씩 겪는 일인데도 그때마다 태연하게 처신하지 못하는 자신이 어설퍼서 마음이 더 울울했지요.

'내 안에는 불나무가 타오르고 있다고 믿었는데 벼르기만 하다가 이젠 삭정이뿐인 것 같아.'

아마 그 말보다 말을 하는 내 얼굴이 더 심란해 보였겠지요. J는 늘 그렇듯 나보다 더 나를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J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네게 줄 게 있어”하며 내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습니다. 초록색 명함첩에는 다섯 장의 예쁜 명함이 들어 있었습니다. 떡살무늬 같은 빛깔 고운 문양 위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가 낯익은 글씨체로 얌전하게 적혀 있었지요.


“직접 만들었어?”

J는 조각칼로 무늬를 새겨 찍고, 펜으로 한 자 한 자 글자를 써넣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다섯 장뿐인 수제 명함이었지요. 다 쓰면 또 만들어주겠노라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어찌 그리 환하게 빛나던지요.

J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쓸모를 증명하고 격려하며 청춘의 뒤안을 견뎌왔습니다. 늦은 나이에 덥석 취업을 결정한 데는, 삭정이로 사윌 것 같은 불안감 못지않게 나의 쓸모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사람의 믿음이 힘이 되었지요.

너른 유리창으로 내가 비춥니다. 어느새 내려앉은 어둠 속에 부표처럼 떠 있는 나를 오래 바라봅니다. 세상에 쓸모를 증명하는 사이, 정작 나를 지켜주었던 믿음의 쓸모는 잊은 것이 아닌지, 생각합니다.

내 안의 불나무를 태우기 바빠 다른 이의 가슴에 숨어 있을 뜨거움에는 냉담하지 않았는지, 그리하여 나 또한 오래 전의 친구처럼 누군가로 하여금 아무 죄 없이도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들지는 않았는지, 캄캄한 바깥세상을 보며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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