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④] 주도하는 탐험길

4. 출정 전야

등록 2006.09.07 11:54수정 2006.09.0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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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백구와 파라곤

백구와 파라곤 ⓒ 오창학


2006년 7월 18일 화요일. 지난 15일, 톈진 탕고에 내린 이래 벌써 나흘째.

16일은 일요일이었던 지라 17일이 되어서야 해관에서 통관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이면 될 줄 알았던 일이 녹녹치 않다. 또 여기서 무슨 일이 꼬이는 일이 아닌가 싶어 마음을 졸인다. 그러나 어쩌랴. 미리 걱정한다고 되고 안 되고 할 일이 아닌 것을. 어차피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어서 관세사 J에게 맡겨 놓고 느긋이 기다린다.


통관이 지연되는 덕분에(?) 출발점인 톈진과 당고를 마음껏 훑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톈진에 오시면 꺼부리 빠오즈(拘不里 包子)에 들러보시길. 천진 특산 음식이다.

1854년 14세 때 음식점에서 일하다 독립한 구불리가 길거리에서 만들어 팔던 만두가 이토록 인기를 끌게 되었다지. 하도 바쁜 나머지 누가와도 쳐다볼 겨를이 없어 ‘개도 안 쳐다본다’는 ‘구불리’로 통했다는 이야기. 현재는 유명한 체인점이 되었고 북경 전인대회장에 들어가는 유일한 밀가루 음식이라는데….

내친 김에 베이징 나들이. GPS(중국 네비게이션)를 얻으러 간다. 에릭님의 지인에게 얻기로 되어 있는데 빌리는 주제에 이쪽으로 가져 오라 하는 노릇.

2001년에 보았던 베이징의 면모는 찾을 길 없다. 그 엄청난 자전거 인파는 어디로 사라진 것이며 차선을 지키는 자동차란 어인 가당찮은 풍모냐. 호텔마다 회사마다 지키고 서 있던 국방코트의 경비들과 거리의 우마차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택시도 전부 현대 ‘엘란트라’와 ‘EF소나타’로 교체된 시점이어서 도시 분위기가 흡사 한국의 서울을 연상케 한다. 중국은 2008 올림픽에 정말 올인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의 거리에서 신호를 지키라고?


a 베이징 후통 거리. 박제화 된 과거가 아닌 삶의 공간. 철저한 현지인화(?)를 위해 노력하는 자포.

베이징 후통 거리. 박제화 된 과거가 아닌 삶의 공간. 철저한 현지인화(?)를 위해 노력하는 자포. ⓒ 오창학


경제성장의 음지인 700년 전통의 *후통. 어떤 이는 이곳에서 골목의 매력을 발견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엿본다 하지만 나는 가난의 냄새를 짙게 맡는다.

누구에겐 생활의 공간이고 또 누구에겐 구경거리가 되는 이곳 후통. 무수한 삼륜 자전거들이 관광객을 태우고 헤집는 이곳은 베이징 도심 면적의 1/3을 차지하고 200만 인구가 머무는 삶의 공간이다. 박제가 아닌 삶의 공간. 때문에 그 모습을 엿보고 싶어 나 역시 카메라를 메고 들어섰지만 왠지 주민들과 눈 마주치기가 부담스럽다.


자포님은 ‘철저한 현지화’를 내걸고 웃통을 반 걷어 올렸다. 대개의 한족들은 윗옷을 벗고 여름을 난다. 그러나 현재의 올림픽 캠페인이 성공한다면 중국 사람들 윗옷 벗고 지내는 광경도 이젠 옛 이야기가 되리라. 흡사 88년 한국의 ‘개고기’캠페인 같은 풍경이다.

문화도 기준치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베이징에선 그 기준치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침 뱉지 않기, 웃통 벗지 않기, 교통질서 지키기 등을 외치며 세계표준화에 부합하는 관습의 창출을 위해 애쓰고 있다.

오늘 오후,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에서 6개월간의 파견근무를 마친 황인덕 교수님께서 톈진으로 내려와 일행과 합류했다. 이로써 며칠 후 시안에서 합류할 ‘마님’을 제외하곤 5명의 구성원이 모두 모인 셈이다. 이 때에 맞추기라도 하듯 중국 측 허가업무를 대행해 주었던 L 총경리(사장)가 도로교통국 업무를 잘 해결하고 손님들을 달고 왔다.

도로교통국 공안들이 숙소로 방문해 임시운전면허증과 임시 번호판을 전달하고, 간단한 주의사항과 안전운전을 위한 당부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묻는 말.“중국의 도로 표지와 신호체계를 아는가?”나의 대답. “안다. 도로지도 뒷면의 표를 보고 외웠다.” 그러나 며칠 천진의 교통 상황을 지켜본 내 속에선 전혀 다른 음성이 고개를 든다.

도대체 저렇게 운전할 거면 표지판 기호와 교통 신호를 무엇 때문에 알아야 한담? 방향지시등을 조작할 여력이 있으면 차라리 남보다 먼저 범퍼를 들이밀고, 앞차가 막힌다 싶으면 중앙선을 넘고, 차든 보행자든 가로막는 존재가 있으면 신경질적인 경음기로 대처하면 될 것 이어늘.

이로써 운전면허, 번호판, 자동차보험, 운행허가서. 모든 서류의 준비도 끝났다. 내일 오전 중에 차를 항구에서 인수해가라는 연락도 받았다. 통관이 이틀이나 걸려서 내심 불안했던 마음이 후련하다. 참 오래 기다렸다. 지난 준비기간 만큼이나 길고 지루한 기다림이 끝났다. 이젠 달릴 수 있다.

2대의 스포츠카와 여섯 남자와 한 여자

a 돌쇠 오창학(왼쪽) 마님 이은주

돌쇠 오창학(왼쪽) 마님 이은주 ⓒ 오창학


백구(白拘·흰강아지): 무쏘 스포츠 2005년 8월식. 배기량 2900cc, 자동기어, 기존 주행거리 2만7999km. 강성스프링과 쇽업쇼바로 1인치 업, 아이솔레이터(전력분산장치), 추가 축전지, 토우바와 윈치 장착, AT타이어 장착. 지붕에 루프텐트 얹음. 여행기간 동안 1호차로 명명.

파라곤(백마를 키우던 실크로드상의 지명): 무쏘 2000년 6월식. 배기량 2900cc, 수동기어, 기존 주행거리 8만9000Km. 강성스프링과 쇽업쇼바로 1인치 업, 전후륜 에어락커 장착, AT타이어 장착. 지붕에 루프텐트 얹음. 여행기간 동안 2호차로 명명.

돌쇠 오창학(남·35): 교사. 팀 인솔자. 1호차 주 운전자. 길 떠남에 두려움이 없고 삶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하는 남자. 문무를 겸비한 재기발랄 우직 남.

마님 이은주(여·33): 교사. 돌쇠의 아내. 팀 일정기록 및 재정관리. 1호차 보조운전자. 돌쇠의 꿈을 존중하는 여자.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감이 있긴 하나 밝고 명랑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음.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

a 에릭 이은권(왼쪽) 자포 박재익

에릭 이은권(왼쪽) 자포 박재익 ⓒ 오창학


교수님 황인덕(남·52): 구비문학 전공 교수, 돌쇠의 은사, 1호차 예비운전자. 실크로드 관련 구비문학 자료 수집을 목표로 하는 연구자. 학문에 대한 열정과 문화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진 뚝심 남.

에릭 이은권(남·46): 외국어학원장, 2호차 주운전자. 촬영담당. 대만 유학파로 실크로드의 문화와 역사에 지대한 관심.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 문화에도 밝음은 물론 등산, 마라톤, 차, 와인을 즐기며 사진에도 조예가 깊은 다재다능 세심 남.

a 교수님 황인덕(왼쪽) 나리 박종일

교수님 황인덕(왼쪽) 나리 박종일 ⓒ 오창학


자포 박재익(남·46): 전 사업가. 현 대학원생. 정비담당, 에릭의 중학 동창. 2호차 보조운전자. 오로지 일만 알며 살다가 평생의 사업을 접고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때에 초유의 여행을 기획하는 중년. 천성이 이과생 성향이면서도 시인 등단을 앞두고 있는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나리 박종일(남·45): 사업가. 에릭의 고교 후배. 2호차 예비운전자. 분주한 사업의 와중에도 사막의 별을 그리워하던 순수 남. 일본유학과 영국 체류, 미국 거주의 경력을 가진 국제인으로 출중한 언어 감각과 재치로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 창출자.

가이드 유철봉(남·32): 조선족 교포, 두 아이의 아버지. 흑룡강성 치치알에서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6년 전 쓰촨(사천)성에서 여행가이드로 전환한 성격 좋고 무던한 사내.(중국 내 외국차량의 운행은 관련공무원, 또는 중국인 안내원의 동행을 전제로 허가된다. 여행의 진행은 중국 정부측에 사전 허가 신청한 노선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데 가이드는 안내와 더불어 이를 책임지고 지도 감독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가이드 철봉씨 힘내세요

a 가이드 류철봉

가이드 류철봉 ⓒ 오창학

흑룡강성 하얼빈에서도 4시간을 더 들어가는 곳이 고향이라는 철봉씨는 충청도 할아버지의 손자이지만 경상도가 고향인 마을 사람들의 말을 쓴다. 사범학교를 나와 소학교 교원을 했다던 그는 나이 스물 여섯에 쓰촨(사천)성으로 넘어가 자신의 누나처럼 가이드가 되었다.

우리가 가려는 노선을 돌아 본 적이 없는 철봉씨는, 아니 쓰촨을 떠나 여행한 적이 없는 이 양반은 길도 모르고 운전도 못 하는 사람을 차에 태우고 다니며 우리가 누굴 관광시켜 줄 일 있냐며 아연해하는 우리 반응에 기가 죽었다. 그 먼 길을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오로지 우리의 힘으로 찾아 돌아야 한다는 말인가.

L경리에게 항의의 말을 전할까 하다가 철봉씨의 축 처진 어깨를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생각해 보면 국내에 이런 식의 여행이 일반화되어 있질 않은데 중국 서부 끝까지 자동차로 여행한 ‘조선족’을 찾는다는 게 애초부터 어불성설이다.

계획은 ‘모험’으로 해 놓고 진행은 ‘여행서비스’로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이 여행이 조금이라도 ‘모험’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건 ‘알 수 없음’‘미지수’‘불확실’때문이다. 잘 하지 않았던 방식, 혹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 하여 내 눈앞에 어떤 길이 놓여 있고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긴장감. 난 그걸 위해 길을 떠난 것 아니냐.

철봉씨 힘내! 난 당신이 ‘초짜’라 고마워. 자칫하면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여행을 할 뻔했잖아. 명색이 탐험대인데, 다 알고 있는. 누군가가 알고 있는 길로만 나를 이끈다면 나는 운전수에 불과한 사람 아니겠어. 정말이지 당신이 그 길을 안 가 본 사람이라 고마워.

덧붙이는 글 | *후통: ‘우물’이라는 Ent의 몽골어 ‘후툭(Xuttuck)’에서 유래. 물이 귀한 땅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몽골인들이 우물 주변에 마을을 형성하던 전통에 따라 원왕조의 베이징 천도 이래 왕성 주변에 ‘후통’을 이루게 된 것이 연원.

이 글은 자동차여행 포털사이트 '알브이 라이프( http://rvlife.co.kr)'에도 게재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후통: ‘우물’이라는 Ent의 몽골어 ‘후툭(Xuttuck)’에서 유래. 물이 귀한 땅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몽골인들이 우물 주변에 마을을 형성하던 전통에 따라 원왕조의 베이징 천도 이래 왕성 주변에 ‘후통’을 이루게 된 것이 연원.

이 글은 자동차여행 포털사이트 '알브이 라이프( http://rvlife.co.kr)'에도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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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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