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9회

등록 2006.09.08 08:22수정 2006.09.08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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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산노인이 머리를 흔들며 입을 다물 태세를 보이자 윤석진이 물었다.

"최소한 누군지는 감을 잡고 계실 것 아닙니까?"


"모른다니까… 괜히 생사람 잡고 싶은 마음도 없고, 뚜렷하게 감이 오는 인물도 없어."

귀산노인은 정말 모른다는 말투였다. 귀찮기도 하고 더 이상 묻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보주가 맞소?"

다시 백도 자인이 물었다. 귀산노인조차 흉수 발설을 꺼린다면 보주밖에 없을 것이란 추측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허나 귀산노인의 입술이 비틀어지며 피식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같잖다는 기색이었다.

"보주의 성격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만약 보주가 흉수였다면 심인검을 사용했을 것 같은가? 보주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무공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아니 육파일방의 무공을 사용했다면 어떨까? 아니면 삼합회의 남궁세가 무공이라던가…. 아니 차라리 자네 사부의 무공 역시 펼칠 수 있을걸? 그래도 보주라고 단정할 텐가?"


"사부를 죽일 수 있는 무공은 그리 많지 않소. 더구나 사부가 제대로 손조차 쓰지 못할 정도의 무공이라면 심인검 밖에 없소."

"그래서 심인검을 사용해 죽였다? 내가 죽였으니 알아서 해라? 그건가?"


귀산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넨 보기보다 어리석군. 물론 자네는 경험이 많지 않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이 중원에 철담을 죽일 수 있는 무공은 최소한 여섯 가지가 넘어. 자네도 잘 생각해 보면 그 무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게야."

그 말에 윤석진과 백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귀산노인이 말한 여섯 가지 무공이 일순간에 모두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정도는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심인검만이 유일한 무공은 아니었다. 윤석진이 고집을 피우듯 다시 물었다.

"보주가 익힌 독문무공이 심인검 아닙니까?"

"보주가 다른 무공을 익히지 않았을 것이라 어떻게 장담하지? 자네들은 아직 보주를 몰라. 보주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지. 무신(武神)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가 무신이야. 그는 상대와 몇 번 손속을 교환하면 상대의 무공까지도 펼칠 수 있는 사람이지. 이해할 수 있겠나?"

윤석진은 놀랍기도 하고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인물이 익힌 무공을 펼치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초식을 배우거나, 구결을 외운다고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정잡배의 싸움질 정도라면 누구나 보고 사용할 수 있겠지만, 상승의 독문무공이라면 본신의 진기 운용이 전제가 되기 때문에 형(形)과 격(格)은 따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본래 위력을 전혀 발휘할 수가 없다. 따라서 자신이 익힌 진기운용과 맞지 않는 초식과 무공이라면 오히려 해가될 수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도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귀산노인의 말대로 보주가 그런 제약을 뛰어넘은 인물이라면 그는 확실히 무신이라고 인정할만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떡이는 운석진과는 달리 백도 자인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는 흉수를 모른다는 귀산노인의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귀산노인이 흉수를 모른다면 흉수는 분명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 분명할 터였다.

고개를 끄떡이다가 자신의 사형이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을 본 윤석진이 그냥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짐작 가는 바도 없단 말입니까?"

"짐작…? 짐작 가는 인물들이야 많지. 가장 의심이 가는 인물이 누군지 아는가?"

귀산노인이 갑자기 흥미를 느낀 듯 나직이 속삭이듯 말하자 윤석진의 얼굴에 기대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누굽니까?"

"바로 자네야…!"

"그… 농담이라도 그리 심한 말씀을…?"

"농담이 아니지. 모든 정황을 살펴볼 때 자네가 가장 유력하단 말일세. 철담의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자네야. 더구나 철담이 가장 방비하지 못하고 당할 상대가 바로 자네지. 또한 자네 역시 철담의 사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나는 심인검을 익힌 적이 없습니다."

"누가 철담의 시신에 난 사인이 심인검에 의한 것이라 확신할 텐가? 자네의 쇄금도는 그런 상처를 내지 못하리란 법이 있는가?"

윤석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귀산노인의 말을 들어보니 하나도 틀린 데가 없었다. 만약 그 지목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남이었다면 충분히 흉수라고 생각할 만 했다.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귀산노인이 저렇게 생각한다면 다른 인물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란 법이 없다.

"나… 나는 아니오. 내가 무슨 이유로 존경하는 사부님을 시해하겠소? 더구나 나에게 사부님을 시해할 능력이나 있소?"

"그렇다면 보주에게 평생의 친구를 죽일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 속내야 누가 알겠소?"

"마찬가지지. 자네에게 철담을 죽일 이유가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나? 자네 역시 그리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 무슨 말인가? 특히 뒷말을 흐리는 귀산노인의 말투에는 의미심장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윤석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구석에 처박혀 있는 귀산노인이 아무도 모르는 무언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거 꼼짝없이 사부를 시해한 흉수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려…."

마치 탄식하듯, 한편으로는 체념의 기색까지 보이면서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속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어서 귀산노인에게 흉수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보다 오히려 흉수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한 점이 윤석진의 장점이었다. 그는 두뇌가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지 몰라도 상대에게 자신의 말을 믿게 하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모든 것이 그렇다는 말이네. 자네와 마찬가지로 철담의 죽음에 있어서는 이 운중보 내에 있는 어떠한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지. 그것이 노부가 함부로 누구라고 짐작할 수 없는 이유네."

사실 대화는 윤석진과 하고 있었지만 귀산노인으로서는 백도 자인에게 들으라는 말이었다. 백도의 성격을 알고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사부인 철담이 죽었으니 지금으로서는 귀산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백도 자인에게 짐작 가는 인물을 말해 준다면 틀림없이 자인은 오늘 내로 그 자를 죽일 터였다. 설사 그가 흉수가 아니라 해도 그는 반드시 죽일 터였다. 그리고 또 다시 자신에게 물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백도 자인은 한마디 던지고 불쑥 몸을 돌렸다.

"내일 다시 오겠소."

윤석진이 엉거주춤 그의 뒤를 따랐다.

"오는 것이야 자네 마음이지. 하지만 자네들도 조심하게나. 흉수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네 사부를 살해했는지 모르지만 그 화가 자네들까지 미칠 수 있어."

그 말에 걸어 나가던 윤석진의 몸이 움찔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좋은 말씀이오."

백도 자인은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한마디 던지고는 방을 벗어나고 있었다. 윤석진마저 방을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귀산노인의 얼굴에 짜증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리 감정을 죽인 녀석이라 해도 사부의 죽음은 충격이었나? 저 자인 녀석이 의외로 적극적인 걸. 저 녀석이 설쳐대면 앞으로 시끄럽겠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흉수가 밝혀지지 않는 한 앞으로 자인은 매일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아니면 하루 종일 자신의 곁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주 귀찮은 혹덩이가 목에 매달린 듯한 느낌이었다.

"헌데… 저 멍청스런 녀석의 어디를 보고 상만천이 선택했을까?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군."

저 멍청스런 녀석이란 백도 자인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쇄금도 윤석진을 상만천이 선택했다는 말인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 귀산노인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다시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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