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8회

등록 2006.09.07 08:24수정 2006.09.0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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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데리고 들어 온 것은 우연이었다. 워낙 간섭하길 좋아하는 그의 버릇이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보았던 그것. 그것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더구나 첫 인상이 자신의 취향에 맞았고, 마음에 들기도 했다. 남들에게 농담처럼 말한 동생 운운은 결코 마음에 없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나?"


함곡이 무어라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대답이 없자 물은 것이다. 풍철한은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서… 헌데 자네는 뭐라고 그랬나?"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상만천이 왜 여기에 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했네. 이런 일은 정말 기사(奇事) 중의 기사거든."

"자네 말을 듣다보니 아무래도 차기 운중보주가 될 자를 골라 자신의 딸을 맺어주려는 속셈으로 보이는군."

함곡은 고개를 애매하게 저었다.


"물론 그런 의도도 있겠지.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일이 아니야. 분명…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을 거야. 상만천으로서는 여기에 온 것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과 같다고 느낄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가만있어도 저절로 될 일에? 분명 다른 이유가 있어."

그들의 눈에 운중보주와 상만천이 두 손을 마주잡는 모습이 들어왔다.


18

"자네까지 노부의 거처에 웬일인가?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나이를 추측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늙은 노인이었다.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하고 검버섯이 피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송장이 움직이는 듯한 죽음의 냄새를 맡게 하는 노인이었다. 구부정한 허리를 힘겹게 펴며 들어선 두 사내를 번갈아가며 보는 노인의 눈에는 나이답지 않게 매서운 빛이 흘러나왔다.

"그 간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좀 더 일찍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 이제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말을 건넨 사내는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훤칠한 용모의 사내였다. 이마가 넓고 눈이 부리부리해 사내다움이 넘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등 뒤에 삐쭉 솟은 도의 손잡이와 왼쪽 어깨에 몇 줄 감긴 가느다란 쇠사슬이었다.

삼년 전이라면 아무도 그를 금방 알아볼 수 없었겠지만 지금 그것을 보고 모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쇠사슬이 연결된 도를 사용하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고, 삼년 만에 쇄금도(鎖擒刀)란 병기 이름과 명호를 얻은 인물은 쇄금도(鎖擒刀) 윤석진(尹晳振) 오직 그 하나뿐이기 때문이었다.

쇄금도(鎖擒刀)라 불린 그의 기형도는 사부의 철담과 비슷한 묘용이 있었고, 짧다면 짧은 삼년의 기간이었지만 세간에서는 이미 그 위력 역시 철담에 뒤지지 않는다고 평하고 있는 터였다. 평상시 도로서도 충분한 효용도 있었지만, 쇠사슬에 연결된 도는 상황에 따라 상대와의 거리와 상관없이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철담의 두 제자 중 하나로 삼년 전에 운중보를 나서 단숨에 중원에 그 위명을 떨쳤으나 그 보다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혼례 때문이었다. 그는 하남 개봉과 낙양 일대에 다섯 개의 유명한 주루를 가진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 때까지 운석진과 혼인할 여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어떻게 젊은 나이에 그토록 많은 부를 축적했는지, 어느 가문의 딸인지, 하다못해 이름마저도 알려져 있지 않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혼례식에 모습을 보인 그 여인은 예상을 뛰어넘는 보기 드문 절색이어서 장안 사람들의 입을 딱 벌어지게 했다.

흠이라면 혼기를 놓친 이십대 중반이라는 점뿐이었지만,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그런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다면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않을 터였다. 평생 돈을 물 쓰듯 써도 부족함이 없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더구나 보기 드문 절색의 아내를 맞는다는 것은 사내에게 있어 행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부러워했다. 그는 정말 운 좋은 호남아였다. 하지만 나흘 전에 운중보로 돌아 온 그는 자신의 사부의 시신을 최초로 발견한 불운한 사내이기도 했다.

"산송장을 찾을 이유가 뭐 있었겠나? 그렇지 않아도 자넬 반겨 줄 사람들이 즐비할 텐데.."

"별 말씀을… 오랜만에 돌아왔더니 서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위기도 과거와 다른 것 같고…."

"자네들 사부가 그런 참변을 당한 이후로 더욱 뒤숭숭해졌지."

노인은 쇄금도 윤석진의 말에 대꾸를 하면서도 그와 같이 들어 온 사내에게 신경을 더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저렇게 특이한 기질을 가진 사내라면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킬 만 했다.

우선 피부가 기형적일 정도로 희었다. 아예 햇볕을 쬔 적이 없는 사람처럼 입고 있는 백의보다 더 흰 것 같았다. 더구나 대략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머리칼마저도 온통 한 점의 티도 없이 백발이었다.

그럼에도 얼굴에 주름 한 점 없음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또한 백양목(白楊木)을 깎아 조각한 듯 이목구비가 날카로울 정도로 뚜렷했다. 무엇보다 보는 이로 하여금 껄끄러운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그의 감정 없는 메마른 기질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얼굴이라던가 아니면 몸에서 풍기는 기질이 있게 마련이었다. 이 사내에게는 어떠한 기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바싹 마른 장작과 같은 무감각한 기질의 사내였다.

그는 한 번도 중원에 출도한 바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중원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다만 철담의 대제자로 알려졌을 뿐이었다. 운중보 내라 해서 그를 아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의 모습을 알아볼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운중보 내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의 명호만큼은 머리 속에 새기고 있었다.

백도(白刀) 자인(仔引).
철담에게 무례했다는 이유로 이름난 절정고수가 그의 백도(白刀)에 단 일초 만에 쓰러진 이후 그는 운중보 내에서 죽음의 그림자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그 두 건의 사건은 운중보 내에서도 쉬쉬했지만 소문이 은밀하게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누구요?"

백도 자인의 음성 역시 무감각했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아 그와 상대하는 사람은 마치 시체와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 것이었다.

"뭐가 말인가?"

노인은 기분이 언짢다는 듯 되물었다. 허나 백도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노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산송장인 노부가 그것을 어찌 알겠나? 알면 보주께 벌써 말씀드렸지 가만있었겠나?"

백도 자인의 물음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던 노인은 백도의 시선에 움찔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운중보 내에서 일어난 일을 귀산(鬼算) 어르신께서 모르신다는 것이 말이 되오?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 입을 열지 않고 계시는 게요?"

노인은 주름살 가득한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저 인간의 음성을 듣고 있느니 차라리 고막을 파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허나 귀산이라 불린 노인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운중보 내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적지 않았다.

"빌어먹을…!"

귀산노인은 성격이 괴팍하고 운중보주 앞에서라도 쓴 소리를 잘한다는 노인이었다. 산학(算學)에 있어서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인물로 그 때문인지 운중보의 모든 살림살이를 관장하는 노인이었다. 귀산노인은 신기하게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은 돈으로 풍족하게 운중보를 꾸려나가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운중보 내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그만큼 소상하게 아는 인물이 드물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운중보 전체 인원과 개개인의 특징에 대해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해 세세하게 파악을 하지 않으면 그리 정확한 계산이 나오지 않을 터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귀산노인은 투덜거리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뉘였다. 그의 두 눈은 가늘게 떠졌고, 조금 전과는 달리 백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몰라… 모른다면 모르는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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