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⑤] 만리를 걷는 것은...

5. 톈진에서 바오딩까지

등록 2006.09.11 17:14수정 2006.09.1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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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수요일. 오전에 톈진항에 가서 차를 찾았다. 항 내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게 궁벽한 곳에 컨테이너로 된 통운 사무실이 있다. 돌아돌아 외진 주차장에 당도하니 흙비를 뒤집어 쓴 백구와 파라곤이 보인다.

“푸로르릉, 글글글”
중국에서의 첫 시동을 거는데 녀석의 심장음이 예전처럼 가볍다. 반갑다, 백구. 그 며칠 새에도 건강했구나. 녀석을 향해 씨익 웃는다. 너나 나나 잘 견뎠다. 이제 출발하는 거야.


a 통관 절차를 마친 차량을 천진항에서 인수

통관 절차를 마친 차량을 천진항에서 인수 ⓒ 오창학


난생 처음 접하는 중국의 교통상황에 심신이 긴장된다. 한국의 교통상황을 견뎌낼 정도면 어디 가서 꿇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이곳의 상황은 사람을 바짝 쪼그라들게 한다. 똥개도 제 집에선 반 먹고 들어간다는 말을 절감한다. 질주하는 게 아니니 죽지는 않는다. 다만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이번 여행은 끝이다. 그토록 공들여 여기까지 왔는데 단 한 번의 사고가 모든 걸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부담이 사람을 더 위축되게 한다.

실은, 교통상황이란 게 한국과 다르긴 다르다. 직진 신호에 같이 떨어지는 좌회전은 원칙적으로 ‘비보호 좌회전’이다. 내게 질주하는 차들을 뚫고 ‘알아서’ 좌회전해야 한다. 추월을 할 때도 도대체 좌, 우측의 구분이 없다. 형편 되는대로 좌, 우 어느 쪽이든 내질러 추월한다. 주행 차선을 구분하는 중앙선은 그저 페인트가 남아 부어놓은 선이 분명하다.

운전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주요인은 차보다도 사람이다. 지그재그로 추월하는 차량들 가운데 그 속을 뚫고 무단횡단하는 사람의 무리를 정확히 찾아내 피해야 한다. 정말이지 0.1초의 판단이 치고 안 치고를 결정하게 하는 상황을 한두 번 접하는 게 아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손발만큼이나 뇌도 바쁘다. 나를 바라보며 태연히 무단횡단하는 사람과 나누는 부단한 교감. 그가 피해 줄 것인가, 내가 피해야할 것인가.

1, 2호차의 보닛 좌우에 태극기와 오성홍기를 달고 두 차 모두 전조등을 켠 채 정속 주행한 탓에 다른 차들이 배려를 해 주는 게 이 정도다. 요란하게 스티커를 붙이고 지붕에 무언가를 얹은 낯선 차가 나란히 지나가니 무슨 외빈이라도 되는가 여기는가 보다.


며칠 톈진에서 지내며 저런 교통 상황에서 우리가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저으기 염려는 해왔던 터이지만 막상 운전석에 앉으니 상태는 더 심각하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어찌 알 수 있었으랴. 그래도 톈진은 한산한 준법도시였던 것을.

a 임시 번호판 부착. 부착 위치와 방법에 대해 한참을 갑론을박하다가 드디어 자리를 잡았다. 번호판은 사용 후 출국 시 반납하여야 하기에 튼튼하게 부착하여야 한다.

임시 번호판 부착. 부착 위치와 방법에 대해 한참을 갑론을박하다가 드디어 자리를 잡았다. 번호판은 사용 후 출국 시 반납하여야 하기에 튼튼하게 부착하여야 한다. ⓒ 오창학


임시 번호판 부착을 위해 수리창에 들렀다. 붙일 위치와 부착 방법에 대해 한참을 갑론을박. 결국 떼고, 뚫고, 복잡한 절차를 통해 부착을 끝냈다. 무슨 일을 하든 중국의 업소엔 사람이 많다. 번호판 하늘 달아도 너덧 사람이 달라붙고 세차 한 번을 맡겨도 대여섯 명이 기본이다.


'만 리를 걷는 것이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나으리니'

수리창에서 나서는데 L경리가 장도를 빌며 점심을 내겠다 한다.

a 샹마저우(上馬酒). 먼 길 떠나는 이에게 술잔을 올리며 무사귀환을 비는 중국 전송 의식이다. 중국측의 L경리(사진의 중앙)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다들 달뜨고 웃는 자리였는데 잔을 들며 표정이 비장하다.

샹마저우(上馬酒). 먼 길 떠나는 이에게 술잔을 올리며 무사귀환을 비는 중국 전송 의식이다. 중국측의 L경리(사진의 중앙)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다들 달뜨고 웃는 자리였는데 잔을 들며 표정이 비장하다. ⓒ 오창학


“만 리를 걷는 것이 만 권의 책을 읽는 것 보다 나으리니.(行萬里路, 勝讀萬卷書)”
경리가 잔을 돌리며 서하객(徐霞客)의 말로 치하했다. 가슴에 남는 말이다. 스스로도 ‘나를 키운 건 8할이 여행’이라 뇌던 내게 또 다른 격려의 말이 되었다.

샹마저우(上馬酒). 먼 길 떠나는 이에게 무사귀환을 빌며 술을 올리는 중국의 전송의식을 우리에게 해 주고 있는 모양이다. 비록 술 한 잔을 입에 못 대는 처지라 잔을 받지는 못 했지만 경리의 기원대로 무사히 돌아와 샤마저우(下馬酒) 자리에도 참석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다들 고맙다며 웃음을 짓는데 분위기는 어째 이리 비감하냐. 비로소 떠나는 이 길이 얼마나 멀고 불확실한가를 다시 한 번 떠올렸으리라. 한민족 발자취를 찾는다는 나름의 목표가 언제 ‘무사귀환’으로 바뀌게 될지 모를 일이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톈진을 떴다. 내일 중으론 시안(西安)이나 뤄양(洛陽)에 도착해야 한다. 여기서부터의 거리 930Km. 애초 하루에 가려 했던 길이나 오늘 가는 데까지 가고 나머지를 내일 가고자 한다. 이대로 톈진 외곽순환도로를 탄 후 허베이(河北)평원을 가로 지르는 톈바오(天保)고속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대략 230여Km 경과한 스좌창(石家庄)쯤에 묵게 되리라.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가슴이 확 트인다. 시내의 아비규환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얼마 되지 않았는지 깔끔한 검정 바닥이 선명하고 지평선까지 뻗은 시야가 쾌청하다. 승용차는 그리 흔하지 않고 화물차들이 주종인데 길을 메울 정도는 아니다.

a 차를 업은 차. 경비 절약 차원에서 이러는데 중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차를 업은 차. 경비 절약 차원에서 이러는데 중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오창학


중국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독특한 광경. 트럭 위에 트럭이 업혀서 간다. 벌써 여러 차례 그런 광경을 목격한다. 한 번 움직이면 수 천 킬로미터를 움직여야 하니 물건을 실으러 공차로 이동할 땐 한 대를 다른 한 대에 얹어 가는 방법을 쓴다. 며칠 간 수천 킬로미터를 그렇게 이동하면 도로비며 연료비며 막대한 경비가 절약될 법도 하다. 두 운전자가 한 대를 교대로 운전한다면 덜 피곤할 터이고.

'실연의 아픔'

이제와 고백하건데 내겐 아내 말고도 마음을 준 존재가 있다. 그 앞에만 서면 심장이 뻐근하고 이마에 미열 같은 기운이 서린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맞춤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그저 “아...”하고 엷은 신음만 뱉게 하는.

쭉 빠진 자태에 공격적이랄 만치 선 굵은 풍모와 백만 가지 감흥을 일게 하는 그의 섬세한 표정을 읽노라면 과연 내가 그를 사랑해도 되는가 싶다. 나의 사랑 나의 연인.

오늘의 일을 하마 파경이라 말할까. 실연이라 표할까. 고속도로 중간에서 그녀가 터져버렸다. 나들목 진입 48Km 지점. 우두두두. 갑자기 차체가 부르르 떨고 운전대가 요동친다. 운전 노면 주름 때문인지 차체 이상 때문인지 몰라 2호차의 상태를 물으려는 순간, 무전기가 다급한 말을 토해낸다.

“1호차! 연기납니닷!”

어쩐지. 뒤가 한산함을 확인하고 급히 1차선에서 갓길로 차를 세웠다. 운전대가 통제력을 상실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고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좌측 후륜의 그녀가 처참히 찢겨져 있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a 실연의 아픔. 고속도로 한 복판에서 그녀가 터져 버렸다.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보다 믿었던 대상에 대한 배신이 더 뼈 아프다.

실연의 아픔. 고속도로 한 복판에서 그녀가 터져 버렸다.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보다 믿었던 대상에 대한 배신이 더 뼈 아프다. ⓒ 오창학


만일 뒷바퀴가 아니라 앞 바퀴였다면? 140Km로 주행 중이었다면? 옆에 차가 오고 있었다면? 차를 세우고 나서도 등줄기가 찌릿해지는 상상이다. 사고가 난 것과 날 뻔 한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다시 확인한다. 오늘 문제는 타이어의 ‘구멍(펑크)’이 아닌 ‘찢김(터짐, 파스)’으로 인한 증상이 분명한데 딱히 떠오르는 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자포님은 백만분의 일 비율로 존배한다는 ‘불량품설’을 제기했다. 어떤 이는 톈진 어디선가 입은 손상이 압력을 못 이긴 것이라는 ‘기존손상설’을 말했고, 또 어떤 이는 내가 보지 못한 고속도로의 이물질, 이를테면 큰 나사나 모서리 돌 같은 것에 찢긴 것이라는 ‘주행 중 손상설’을 이야기 한다. 정말 모를 일이다.

a BF AT 타이어 255/70 R16. 내가 반한 그녀의 자태.

BF AT 타이어 255/70 R16. 내가 반한 그녀의 자태. ⓒ 오창학


오프로드에서의 거친 노면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AT(All-Terrain)타이어가 깨끗한 고속도로를 시속 100Km로 주행하다 터져버렸다. 별 사고 없이 내가 살았다는 안도보다는 연정을 품었던 믿음의 대상에 대한 배반의 아픔이 크다. 펑크와 추력에 강하다는 넓은 2중 스틸벨트는 다 뭐였나. 모래와 진흙에 타이어가 묻힌 상태에서도 구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쇼울더록은 다 뭐였나. 너의 당당한 자태는 다 어디로 가고 왜소한 사체만 남았나.

너를 믿고 나머지 구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너를 향한 애정이 계속 유효할 수 있을까.

a 졸지에 정비기사가 된 자포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졸지에 정비기사가 된 자포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 오창학


‘정비담당’ 자포님이 재빠르게 공구를 챙겨 나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맞는 말이다. 굴지의 택시회사 사장이었던 양반이 손수 공구를 챙겨 후끈한 열기 아래 땀을 쏟는다. 딱히 정비기술을 습득한 것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 정비사업소 관리자 경력을 포함해 우리들 중 차량에 대한 이해의 폭이 가장 넓은 이였기에 배정된 역할이었다.

강성스프링으로 하체를 보강한 터라 순정 잭으로는 아무리 들어올려도 바퀴가 땅에서 뜨질 않는다. 한 개로 최대치까지 올린 후 그 옆에서 다시 또 한 개의 잭을 돌 위에 얹어 올리니 교체할 공간이 생겼다. 온통 땀으로 범벅된 자포님과 나리님을 보며 뭉클한 동지애를 느낀다.

다시 길을 재촉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든다. 인천을 떠나며 깨진 앞유리, 중국 첫길에 터진 타이어.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나는 이 여행을 지금이라도 중단하라는 계시가 아닐까 걱정하는데 2호차 사람들은 일정 중 생길 방정맞은 일들에 대한 액땜이라며 애써 안심 시킨다. 제발 그렇기를. 이보다 더한 일은 안 생기기를.

a 중국 네비게이션. 길 찾기 첫날의 훌륭한 안내자.

중국 네비게이션. 길 찾기 첫날의 훌륭한 안내자. ⓒ 오창학


타이어 교체 작업으로 시간이 지체되었다. 중국에서의 첫 운전날이니 만큼 야간 운전은 피하기로 했다. 숙소 찾을 일도 걱정이고 하여 쓰좌창 135Km 전 바오딩(保定)시로 들어간다. 다들 긴장한 첫 길인데 중국 네비게이션이 오차 범위 수십 미터 내까지 정확히 숙소를 안내한다. 이런 기계가 있었냐며 신기해 하던 가이드 철봉씨는 금세 조작에 능숙해졌다.

숙소에 몸을 뉘니 긴장한 몸이 탁 풀어진다. 한참 얼었던 하루가 간다. 오늘은 무사하다.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 잘 지내. 모든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 어서 시안에서 봅시다.”

타이어 얘긴 하지 못했다. 같이 겪고 있는 때와 그저 말로만 전해 들을 때의 걱정이란 그 무게가 다름을 알기에. 그래서였을까. 지난 달 시골집 청소하다 발견한 스물 두 살 무렵 훈련소에서 편지. 부모님이 수신자로 되어 있는 그 편지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다.

“몸 건강히 잘 있습니다. 군대밥도 입에 맞고 조교들은 꼭 형 같이 대해줍니다.”

때로는 반어가 직설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다. 바오딩의 밤은 그렇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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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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