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31회

등록 2006.09.12 08:15수정 2006.09.12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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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그건 무슨 말이오? 어차피 이 사건을 조사한다는 점에서는 당신과 내 입장이 다를 바 없잖소?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자 하는 것뿐인데…."

"확신이 없는 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고, 추측은 선입관을 불러와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단점이 있소. 때가 되면 말씀드릴 것이니 걱정 마시오."


쇄금도 윤석진의 태도가 단호해 보이자 함곡이 나섰다.

"허… 자네나 나나 아주 든든한 동반자를 얻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이곳의 지형조차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윤대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네."

풍철한이 조급하게 파고들려 하자 함곡이 그 말을 막으며 풍철한을 보며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이쯤해서 놔주자는 것이었다. 반드시 도움 받을 것을 기대해서만은 아니었다.

"제 능력이 모자라 두 분께 실망을 드릴까 두렵소."

윤석진 역시 함곡이 이쯤해서 오늘은 마무리 짓자는 의미에서 한 말을 못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자신이 바라던 바였다.


"무슨 그런 겸양의 말씀을… 윤대협은 분명 우리에게 꼭 필요하신 분이오. 수시로 만나서 서로 상의하도록 합시다."

"두 분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오겠소."


"정말 고마운 말씀이시오. 헌데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소?"

함곡의 한 가지 부탁이란 말에 윤석진은 순간적으로 잠시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함곡이 아무렇지도 않는 듯 미소를 짓자 윤석진 역시 어색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어떤 분부이신지?"

"분부라니…? 오늘 철담어른의 거처에 가보니 많은 분들이 왔다 가신 듯 하오. 사실 사건현장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야 정확한 판단을 하는 법인데 좀 어수선한 느낌도 들었소."

"……!"

"그래서… 사건 현장을 제일 먼저 보신 분이 윤대협 아니시오? 지금 돌아가시는 길에 철담어른의 거처를 들러 처음 본 것과 달라진 것이 없나 한 번 살펴봐 주시오. 만약 달라졌다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는 말씀이구려. 옳으신 말씀이오. 내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소. 지금 즉시 세밀하게 조사해 보리다."

"그리 혼쾌히 부탁을 들어주시니 너무 고맙소."

"고마운 것은 저외다. 그런 부분을 깨우쳐 주신 함곡선생께 감사드리오."

윤석진은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포권을 취하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주제는 넘지만 두 분께 한 가지 조언을 드리겠소. 여기는 운중보요. 운중보 내의 일은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셔야 해결이 빨라질 거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분명 윤석진은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보인 말일 것이다.

"충고 고맙소."

"별 말씀을…."

윤석진은 몸을 돌려 현무각을 벗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풍철한이 눈을 찡긋했다.

"저 자는 무엇을 감추려하는 것이지?"

"모르지. 분명한 것은 저 자 역시 철담어른의 사망시각에 자신의 거처에 있었다는 거야. 그것은 그가 그 시각에 어디에 있었는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확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지."

"내일 다시 만나보면 또 뭔가가 나오겠지."

풍철한은 중얼거리면서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 때였다. 열려진 방문 밖으로 선화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함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각이 이리 되었군. 가세나."

함곡이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자 풍철한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렇군. 그러고 보니 배가 출출하기도 하군."

방문을 나서다 선화와 반효 만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이 자식은 어디에 있어?"

아마 설중행이 없는 것에 대해 물어본 말일 것이다. 반효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 주위나 둘러본다고 나갑디다. 경치가 참 좋은 곳이라며…."

"뼉다귀가 단단한 놈이야. 심한 부상은 아니지만 그 정도면 며칠은 꼼짝 않고 쉬어야 할 놈이 하루 만에 생생해지니 말이야."

반효가 풍철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헌데 대형은 왜 그리 그 자에 대해 관심이 많소? 정말 그 자를 우리 형제에 끼어 넣을 생각이오?"

"왜? 싫어? 그만하면 얼굴도 번듯하겠다. 지독한 근성도 가지고 있어 왠지 정이 가던데…."

"아니 싫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음울한 성격인 것도 같고, 우선 그 자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잖소?"

"이제부터 차근차근 알아 볼 생각이야. 그 자식 아무래도 뭔가 있는 놈 같아. 영 아니다 싶으면 말면 되니까."

"이게 장난이유?"

"너도 그랬고, 우리 형제들 모두 그랬잖아. 언제 서로 알아보고 형제가 되었냐? 형제가 되기 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가 되고 나서가 중요한 거야."

말을 하면서 먼저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가자구. 없는 녀석 찾다가 천하의 운중보주가 오라는 저녁식사에 늦으면 안 되지."

분명 풍철한은 의식적으로 선화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풍철한으로서는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문밖에는 이미 운중각의 시녀가 와 있었다. 함곡 역시 밖으로 나서며 운중각에서 보낸 시녀를 보았다.

"아무래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하는 게 좋겠지? 어디서부터 조사를 시작해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말이네."

"물론이지. 어차피 같은 배를 탔으니… 그나저나…."

말끝을 흐리던 풍철한이 연무장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기를 했으면 큰일 날 뻔 했군."

어느새 뚝딱거리는 소리가 멈추지는 않았지만 잦아들었고, 연무장 주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상만천이 이미 대충 거처를 마련하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돈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하고 있었다. 결국 불가능이란 말은 돈이 없는 자의 변명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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