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34회

등록 2006.09.15 08:23수정 2006.09.15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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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애써 감추려는 옥기룡의 목소리에 함곡과 풍철한은 자신 만의 생각에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풍철한이 물었다.

“혈간 어른께서는 수로(水路)를 이용해 오시고 계셨소?”


옥기룡이 그것을 어찌 아느냐는 듯 의혹스런 표정을 띠웠다.

“그렇소. 본래 낚시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장강(長江)에 배를 띠워 오시고 계셨소.”

풍철한 그 자신도 근원을 알 수 없는 환시능력. 배는 맞는 것 같았다.

“수행한 분들은 몇 분이나 되셨소?”

“백부님을 제외하면 모두 세 분이었소.”


옥기룡이 세 명이 아니라 세 분이라고 표현한 것은 혈간을 수행한 자들이 철기문에서도 그 지위가 낮지 않은 인물들이라는 의미다. 설중행이 아무리 자신을 감추고 있더라도 풍철한이 파악한 것으로는 그들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자신의 뇌리에 스친 그 환영은?

그는 힐끗 보주를 바라보았다. 보주의 표정은 변하지 않고 있었으나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보주도 사람인 바에야 한 평생을 같이 한 친구 두 명을 며칠 새로 잃었으니 괴로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풍철한은 함곡을 잠시 보았다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소생으로서는...”

그는 보주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자신에게 맡겨진 이 일은 본래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일련의 사건은 복잡한 정도가 아니었다. 알지 못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천하의 호한이라는 풍철한에게는 매우 낯선 느낌이었지만 지금 느끼고 있는 심정이 그랬다. 그의 말에 보주가 눈을 뜨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눈치를 보았다.

“능력이 부족하여 이번 일을 맡기...”

번---쩍----!

보주의 눈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섬광이 번뜩였다. 그 눈빛에 접한 풍철한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한 순간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말로만 듣던 운중보주의 일면을 본 것도 같았다.

“무엇을 보았나? 무엇을 보았기에 천하의 풍철한이 그런 말을 하는 겐가?”

좌중의 인물들은 보주의 말에서 보주가 풍철한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정작 풍철한은 경악스러웠다. 무엇을 보았느냐고? 보주는 이미 자신이 본 환영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의 능력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죽음을 헤치고 살아 온 무림인이다. 보주는 잠시 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자네는 자네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군. 자네에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나흘하고 반나절뿐이야. 노부가 자네라면 자꾸 회의(懷疑)하고 이 일에서 빠져 나갈 생각보다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생각하고 움직이겠네.”

나흘하고 반나절. 보주는 이 단어에 특히 힘주어 말했다. 그것은 풍철한과 함곡이 불안해 했던 그 이유를 더욱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풍철한은 대꾸할 말이 없어졌다. 더 이상 이 일에서 빠지겠다는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운중보주와 적이 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함곡이 나섰다.

“이러한 사건들이 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이런 우문(愚問)을 함곡이 하리라곤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주는 함곡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노부가 자네 두 사람에게 원하는 게 바로 그에 대한 대답이라네.”

풍철한이 따지듯 물었다.

“그럼 보주께서는 철담 어른을 왜 죽이셨습니까?”

풍철한이 보주의 눈을 마주보기 어렵다는 듯 눈을 감으며 물었다. 하지만 이 말은 정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이었다.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장문위와 옥기룡의 얼굴에 당장이라도 풍철한을 찢어 죽일 듯한 표정이 떠올랐고, 탁자 밑에 있는 그들의 두 팔은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사부의 앞만 아니었다면 풍철한의 육신은 이 자리에서 수십 조각으로 변했을 터였다.

하지만 보주는 의외로 담담했다. 분명 자신을 모욕하는 말임에도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자네는 억지로 심기를 쓸 필요가 없네. 그렇다고 자네가 이 사건을 마무리하지 않고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

보주의 말은 풍철한이 보주의 심기를 건드려 보주가 노화를 터트리고, 혹시 그 주위의 사람들이 풍철한에게 손이라도 쓴다면 그것을 핑계로 이곳을 빠져 나가려 한다는 의미였다. 장문위와 옥기룡은 자신들이 참았던 사실에 내심 흡족했다. 만약 자신들이 손을 썼다면 자신들은 생각이 짧은 사람으로 사부의 눈에 비추었을 것이다.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내 친구를 죽일 이유나 시간이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대답은 교묘했다. ‘죽이지 않았다’가 아니라 ‘죽일 이유나 시간이 없었다.’ 라고 반문하여 자신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나타냈을 뿐 아니라, 상황에 있어 자신이 흉수가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었다. 사실 명백하게 ‘나는 철담을 죽이지 않았네’ 라고 말한다 해서 달라질 일도 없었다.

“철담 어른께서 피살되던 날... 보주께서는 철담 어른을 만나셨습니까?”

이미 좌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함곡은 풍철한을 보고는 자신이 나서서 대신 물었다.

“만났네. 미시(未時) 초 그의 거처로 가서 같이 차를 마셨지.”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보주의 얼굴에 미세하나마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들의 대화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그들의 대화라면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운중보의 중대한 비밀일 수도 있었다.

“노부는 자네들에게 용봉쌍비를 주었네. 그 권한으로 묻는다고 생각하겠네. 노부의 회갑연에 대해 철담이 너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아 그러지 말라고 하였지. 언제나 운중보가 완벽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고 말이야.”

“언제 나오셨습니까?”

“미시 중반이 아니었나 생각되네. 무당(武當)의 장문인인 청송자(靑松子)와 점창(點蒼)의 장문인 사공도장(四空道長)께서 노부를 찾아 오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왔으니 그때 쯤 이었을 게야.”

좌등이 말한 손님이라면 그들을 말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좌등의 말과 일치하고 있었다. 좌등이 거짓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매우 단순한 것이어서 금새 확인될 것을 거짓말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곳을 나오시기 전 혹시 아미의 장로이신 회운사태를 그곳에서 만나보시지는 않으셨습니까?”

“만났네. 아마 철담이 전갈을 주어 오시라고 한 것으로 기억되네만 노부가 나오기 바로 전 회운사태가 들어왔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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