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미주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노, 왜?

[정치 톺아보기 141] '네오콘' 경고 메시지 왜 나왔나

등록 2006.09.15 15:44수정 2006.09.16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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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대중 전 대통령은 14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어판)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의 우파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더 이상 북한을 악용하고 봉쇄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사진 왼쪽은 이냐시오 라모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14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어판)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의 우파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더 이상 북한을 악용하고 봉쇄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사진 왼쪽은 이냐시오 라모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 르몽드 코리아 제공


의외였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오래 보좌한 참모들에게도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며칠 전 김 전 대통령비서실의 한 측근은 기자에게 이렇게 귀띔했다.

"김 전 대통령께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 기념 특별인터뷰를 가졌는데 말씀이 예사롭지 않다. 현재의 북핵 위기와 북미관계의 교착 국면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으니 챙겨보길 바란다."

그런데 15일자로 창간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을 미리 받아보니 DJ의 발언 수위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갔다.

"네오콘은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을 악용해"

김 전 대통령은 ▲'네오콘'(neocons,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에게 북한문제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했으며 ▲사실상 부시 대통령에게는 네오콘에 휘둘리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부시 대통령이 2002년 2월 자신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대해 공격하지 않고, 대화하고,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세 가지를 약속했는데도 실천이 안되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물론 DJ는 북미 대화가 안 되는데는 북한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미국 앞에 가면 어린애 장난감'이라고 폄하했다. 미국 네오콘은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해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북한이 대화를 간절히 바라는데,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하지 않는 이유를 "바로 중국 때문"이라고 못박았다. 중국을 '미래의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MD(미사일방어체제) 같은 군비확장을 하려는 네오콘에게 북한은 더할 나위없이 좋은 구실이라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이처럼 강경한 어조와 분노한 표정으로 한반도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네오콘과 거기에 휘둘리는 부시 대통령을 힐난한 적이 없다.


은퇴한 노 정객을 분노하게 한 것은?

상상력을 조금 가미해 김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부시 대통령과 힘겹게 대좌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무현식 어법'을 구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는 지금요, 미국에 대해 줄 것 다 주면서 좋은 소리 못 듣고 있는 거요. 월남 파병해서 5천여 명이 죽고, 1만6천여 명이 부상하지 않았어요? 이라크에는 영국 다음으로 우리가 파병하고, 지금 다 철수하고 있는데, 우리는 다시 그대로 둔다는 것 아니요?"

첫째와 둘째를 짚는 화법과 그리고 통계와 숫자를 헤아리는 기억력은 여전하다.

"그럼 이렇게 미국에 협력하는 나라가 세계에 몇이나 있어요? 프랑스도 2차대전 때 미국이 살려준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라크 파병 안했어요. 독일은 2차대전 때 미국과 싸웠지만, 전후 부흥이나 통일할 때 미국이 도와줬는데, 이라크 파병 안했어요. 왜 미국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는 다 놔두고, 왜 우리한테 도움을 잊었다는 이야기를 하느냐?"

무엇이 이렇게 은퇴한 노 정치인을 분노하게 했을까.

인터뷰어인 박순성 편집위원장(동국대 교수)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미주의자'가 아니다"면서 "('반미주의자'가 아닌) 그가 한반도를 위기로 몰아넣는 '주범'으로 네오콘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박 교수의 진단은 부정확하다. DJ는 단지 '반미주의자'가 아닌 것이 아니라 '친미주의자'이다. DJ가 '친미주의자'라는 것은 필자가 붙인 레테르가 아니다. DJ를 누구보다 잘 아는 핵심 참모들이 하는 얘기이다.

DJ는 '반미주의자' 아니라, '친미주의자'

DJ에게는 '친미'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계기가 있다. 그에게 미국이라는 존재는 박정희 정권에서 자행된 납치 및 수장(水葬) 위협과 전두환 정권에서 자행된 사형선고라는 두 번의 죽을 고비에서 목숨을 지켜준 '생명의 은인'이다.

이와 같은 개인의 운명적 계기를 근거로 DJ를 '감성적 친미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다면, 한반도와 우리 민족이 처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기울여온 DJ의 노력은 '이성적 친미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미 지난 71년에 '주변4강의 교차승인에 의한 3단계 통일방안'을 수립했던 그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건상, 그의 말대로 "우리가 한반도를 짊어지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 이상" 대한민국의 안보는 물론 통일한국의 안보를 위해서도 '친미'(한미동맹)만이 살 길이라고 꿰뚫어 보았던 그이다.

그는 또한 냉온탕을 오간 대북정책으로 '주파수'를 맞출 수 없던 클린턴 행정부와 불협화음을 빚은 김영삼 정부와 달리 철저한 정보공유로 클린턴 행정부와 '찰떡공조'를 이뤄냈다. 미국의 지원과 협조 없이는 남북 대화도 '모래위의 집짓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그이기에 DJ의 '이성적 친미'는 철저한 동맹간의 신뢰에 기반을 둔 '용미론'(用美論)에 입각해 있다. 그가 '주한미군 철수'를 되뇌어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설득해 김 위원장로부터 동의를 이끌어낸 것도 그런 연유이다.

'네오콘' 발언은 노 대통령에게 작심하고 훈수 둔 것

a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15일 새벽(한국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15일 새벽(한국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승렬


물론 남북 정상회담과 주한미군 주둔 필요성을 인정하는 동의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박지원 전 문광부장관의 대북송금 특검 진술에 따르면, 김 대통령은 2000년 3월 17∼18일 상하이에서 개최한 1차 예비회담 때부터 당시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을 통해 박태준 총리와 보스워스 미국 대사 등에게 접촉 사실을 설명토록 했다. 그러고도 DJ는 박 전 장관에게 "회담 현장에 있었던 숨소리까지 사실 대로 알려주라"고 지시할 만큼 미국을 배려했다.

그런 점에서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한이 사상 처음으로 한민족 전체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려는 김대중 정부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였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치밀한 DJ의 성격으로 보건대, 그의 이번 발언은 노 대통령에게 작심하고 훈수를 둔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이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제가 바라는 것은 남북정상회담을 시간이 더 가기 전에 빨리 해야 한다는 거예요. 노무현 대통령께서 자기 임기 중에 제가 한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계제를 만들어 놓아야 다음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남북관계를 바꾸지 못하게 돼요."

DJ 정부가 5년 동안 '자주'의 'ㅈ'자도 꺼내지 않은 까닭

그러나 DJ는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직접적인 찬반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군사문제에는 전문적 지식이 없지만, 이렇게 생각해요"라면서 말문을 열었다.

"미국이 작전통제권을 넘기든 안 넘기든, 미국이 한국방위를 하고 싶지 않으면 나가는 것이고, 한국방위가 자기 나라에 이익이라면 안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방위를 하는 게 미국의 이익인 거요. 왜냐하면 미국이 만일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면 북한이 중국의 힘을 업고, 중국의 힘이 휴전선까지 미칠 수 있어요. 그러면 그 힘이 바다 건너 일본까지 가요. (동북아시아가) 그렇게 (힘의) 압박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미국이 지켜만보고 내줄 수는 없는 거예요."

이는 노 대통령의 어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8월 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작권 환수와 관련 "2009∼2012년 사이에 어느 때라도 상관없고, 지금 환수되더라도 전작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는 왜 전작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을까. '친미주의자'인 김 전 대통령이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통일외교안보 분야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한 인사는 "노무현 정부의 전작권 환수 방침은 옳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면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5년 동안 '자주'나 '전작권'의 'ㅈ'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미군의 전세계 전략상 주한미군의 전작권을 이양하려는 미국이 먼저 우리에게 전작권을 가져가라고 나올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DJ 자서전 집필 "외교안보통일 분야는 맨나중에"

김 전 대통령은 현재 자신의 80 평생을 정리하는 자서전을 집필 중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자서전 집필자문위원회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안보 등 각 분야별로 30여 명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역할을 분담해 참여하고 있다.

현재 진행 상황을 보면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진척이 가장 앞선 것으로 전해진다. 이 분야는 '햇볕정책의 설계사'인 임동원 전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가 좌장이다. 임 전 특보는 얼마 전에 김 전 대통령에게 "진척이 빠른 분야부터 매듭을 지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건의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답은 "다른 분야부터 먼저 마무리하고 그 분야는 맨나중에 하는 게 좋겠다"는 거였다. 외교안보통일 분야는 아직 자서전 집필을 마무리하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있거나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지난 6월 2차 방북이 무산된 것과 관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한) 정상이 만나야 문제가 풀려요. 저는 나이도 있고, 위치도 있고, 제가 큰일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환경이 가능해지면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갖고 있어요.

그러나, 카터 대통령은 그때, 미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제재 위주정책에서 대화국면으로 변할 때 간 거예요. 카터 대통령이 특사로 할 일을 미국 정부가 뒷받침해준 거예요. 그러나 지금 저는 미국 정부를 대변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 정부를 대변한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어요. 특히 북미관계 만큼은. 이것이 (나와 카터의) 큰 차이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수명)은 물론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시간(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부시 정부 출범 이후 단 한번도 네오콘의 'ㄴ'자도 입밖에 꺼내지 않던 노 정객이 비장한 어조로 "네오콘은 북한문제에서 손을 떼라"고 외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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