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많이 죽었는디 장군이 다 뭐다냐!"

[내 젊음을 바친 군대 14] 현대판 귀양살이 떠나다

등록 2006.09.29 09:49수정 2006.09.2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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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3군단 '귀양살이' 시절(가장 오른쪽).

3군단 '귀양살이' 시절(가장 오른쪽).

광주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때 "비무장한 상태의 시민을 그렇게 무자비 학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무슨 놈의 폭도란 말이냐? 민주화하자고 부르짖는 선량한 시민들인데…." 이런 말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졸지에 강원도 산골 현리라는 곳으로 귀양살이를 가야 했다.


떠나기 전 신군부의 실세였던 동기생이 "좀 요령 있게 말해야지! 니가 너무 순진해서 이렇게 되었는데, 한 6개월만 가 있거라! 다시 안 오것냐!"라고 했다. 나는 그야말로 순진하게 그 친구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세월은 빨리 흘러 현리 골짜기로 쫓겨 간 지도 어느덧 6개월이 지나갔다. "어젯밤은 꿈자리가 좋았으니 오늘은 틀림없이 서울로 돌아오라는 기쁜 소식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종일 기다렸는데 그냥 하루가 또 저물어버렸다.

"다음 주에야 틀림없이 가게 되겠지!"하고 일주일 분 화장지만 샀는데 한 주일이 다시 지나고 또 한 주일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 어두움이 깔려올 제면 "오늘도 연락이 없구나!"하며 우리 선조님 들이 바른말 했다가 귀양살이 떠나 세월 보내시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다.

전혀 사전 계획이나 준비 없이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 갑자기 짐 보따리를 싸 쫓겨왔기 때문에 충격이 오래 갔다. 급변하는 세상이니 1년 귀양살이는 과거의 5년쯤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a 3군단 참모 시절(오른쪽).

3군단 참모 시절(오른쪽).

보안부대장이 마련한 술자리


6개월이 지난 한참 후 아예 돌아갈 것을 포기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안했다. 사실 3군단 현리 골짜기에서 1년 6개월간의 군단 정훈참모 생활은 내 군대생활의 안식년이나 다름없었다.

민족의 군대, 민주군대로의 군 개혁을 생각하며 오직 '정신전력 강화' 한 가지 일에 미쳐서 정신없이 지내오던 나에게 모처럼 주어진 휴식의 기간이었다. 아름다운 산과 계곡, 자연의 정다운 속삭임들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고,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며 깨달음을 안겨 준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귀양살이 온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보안부대장 최 중령이 저녁이나 함께 하자고 했다. 그의 집요한 권주에 따라 못 마시는 술을 정신이 오락가락 하도록 사정없이 마셨다. 사고(思考)의 필름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곤 했다. 옆에 있던 아가씨 등에 내가 업혀가고 있다고 어렴풋이 느꼈다. 이불 위에 나를 눕혀 놓고 꿀물인가 뭔가를 먹여주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 그냥 있다가는 보안대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큰 낭패를 당하게 된다는 생각이 번개 불처럼 스쳐갔다. 나는 문을 박차고 무조건 뛰었다. 어떻게 찾았는지 모르지만 맨발로 관사까지 와서 쓰러졌다. 조금 있으니 보안대 운영과장으로부터 실망스런 목소리로 "좀 편히 쉬었다 가시지 그냥 가셨느냐?"는 전화가 왔다. 군을 개혁해야 한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늘 나를 채찍질하고 긴장시켰다.

a 2군 정훈참모 시절(왼쪽).

2군 정훈참모 시절(왼쪽).

서울로 가지 못하고 대구로 전출명령

그해 겨울 난생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새벽 송을 부르며 돌아다녔다. 새벽 별빛과 맑은 공기를 마시고 뽀드득 뽀드득 눈길을 밟으면서 헌병대 영창 앞과 관사지역 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찬송가를 불렀던 그때의 상쾌한 기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군가보급 예산을 가지고 지역의 중·고등학생들이 주가 되어 있는 기린교회 성가대와 합동으로 군가 합창단을 구성하여 인근 부대와 마을 등을 돌아다니며 야간 순회공연을 했다.

프란체스코의 기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용서를 상처가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을 합창할 때 단원들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듣는 이들의 모습도 모두가 차분히 가라앉는 듯했다. 그 진지한 노랫말과 간절한 소망을 담은 음률은 몇 번을 들어도 나의 처지를 알고 말해주는 듯 늘 새로운 힘으로 심금을 울려주었다.

그러나 군단장으로부터 "군가 보급 사업은 하지 않고 학생들과 합창단이나 만들어 순회공연 하면 되는가?"하는 꾸중을 들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감시와 참견이 늘 따라다닌다고 느꼈다.

한 번은 박준병 기무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군단사령부를 방문했다. 참모들이 도열하여 환영했다. 그가 나와 악수를 하면서 "표명렬 미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 했다. 귀양살이 해제하겠다는 말이다. 이를 보고 있던 군단장이 그후 "아까운 후배 하나 죽일 뻔했다"며 살려야 한다고 사방에 전화를 걸어 나의 진출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과시했다.

이렇게 두 해의 겨울을 보낸 1982년의 초봄에 나는 다시 제2군사령부 대구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서울로 가지 못하고 다시 멀리 가는 것을 보니 표 대령의 군대생활은 이것으로 마지막이라고들 했다.

내가 정훈 병과로 전과한 이래로 정신전력 강화를 위한 연구 하나에 미쳐 얼마나 열정적으로 근무했었던지….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한 해 위인 17기 선배들과 함께 대령 진급을 했다. 정훈 병과에서는 전무후무한 특진을 한 것이다. 사실 필자가 장차 정훈 병과를 이끌어 가게 될 것임은 전과 당시 대위 때부터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들 했다.

사람들은 용케도 알았다. 그 때까지 불필요한 안부 전화와 인사차 방문했다는 사람들,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도 처치 곤란할 정도로 귀찮게 쌓이더니 기무사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사람이라는 소문이 난 다음부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약속이나 한 듯 모든 관계가 뚝 끊겨버렸다. 적막강산처럼 조용해서 좋았다.

a 2군 참모 시절, 안동대 국악과 학생들과 함께(가장 오른쪽).

2군 참모 시절, 안동대 국악과 학생들과 함께(가장 오른쪽).

보안사의 블랙리스트... 어머님의 격려

내가 만약 군대생활의 비전과 꿈을 '군 개혁'이라는 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었다면 광주 민주화 과정에서 바른말한 죄(?) 때문에 대령 달고 3군단 중령 참모 자리로 좌천되었을 때 즉시 군복을 벗어버렸을 것이다. 보안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더 이상 진출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일찍 포기하고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장군으로 진급을 하게 되면 '군 개혁'이라는 나의 꿈을 조금 더 쉽게 이루는 길이기는 해도 장군진급 그 자체가 내 군 생활의 목적은 아니었다. 대령 계급으로도 더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얼마든지 나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꿈을 잃은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결코 당황하거나 군대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귀양살이 떠나기 전날 어머님께서는 나를 앉혀두시고 "명열아! 니가 광주사태 때 바른 말한 것, 그것 때문에 장군이 안 되게 되었다는디 그것은 잘된 일이다! 광주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디 장군이 다 뭐라냐? 나는 내 아들이 자랑스럽다. 니가 참말로 장하다 잉!"이라고 내가 마치 민주화 투사라도 된 듯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러나 서울로 다시 돌아오리라 학수고대 믿고 기다리시던 부모님께서는 내가 대구로 전출되자 크게 실망하시고 그 길로 고향 완도로 내려 가셨다. 아버님께서는 못난 아들의 단순하고 직설적인 처신을 보시고 늘 걱정하시면서도 옳은 일에 굽힘없이 도전하는 끈질김에 대해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험난한 세상을 순탄하게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셔 군대생활이 끝난 후에는 차라리 산 속에 들어가서 정성만 쏟으면 거짓 없이 자라주는 소와 염소를 기르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 하시며 나를 위해서 조상 대대로 물려받으신 산지(山地) 3만여 평을 개간하여 정식 허가를 받아 '삼장목장'이라는 목장을 만드셨다.

아버님께서 생전에 내가 '물가에 둔 어린 애'처럼 얼마나 마음 놓이지 않으셨으면 그렇게 하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죄스러운 마음 때문에 눈물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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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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