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50회

등록 2006.10.16 07:47수정 2007.08.08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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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철한 역시 고개를 천천히 끄떡였다. 그들의 반응을 본 능효봉이 말을 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닐까 하오. 아... 그렇다고 근거를 대라면 나는 할 말이 없소. 단지 내 생각일 뿐이오.”


“아주 정확한 지적이오. 나 역시 그렇게 내심 생각하고 있었소.”

함곡이 동의했다.

“다만 어떤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죽였냐 하는 것이오. 한편으로는 그 어떤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갔는지 까지 알아보기 위해 죽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소. 흉수가 이토록 잔인하게 죽음의 공포감을 오래도록 즐기면서 죽인 것으로 보아 그 어떤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오.”

“범인이 여자라면.... 그리고 홍교란 시녀에게 하는 짓을 본 여자라면.... 또 한 가지 그녀가 과거에 사내에 의해 짓밟혔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변태스런 행위에 능욕당한 기억이 있는 여자라면 그렇게 한 것이 이상스런 일은 아닐 거요.”

능효봉은 아주 간단하게 농을 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함곡은 마치 둔기로 뒷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능효봉은 매우 자유스런 사고(思考)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독룡아라는 것에 얽매여 범인이 남자라고 고식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 잘못일 수도 있었다. 풍철한이 범인이 두 명이라고 했던 말도 어쩌면 맞는 것 같았다. 독룡아를 여자라고 사용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능대협은 앞으로도 매우 큰 도움이 될 것 같소.”

함곡의 말에 능효봉은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과찬의 말씀을... 그렇다고 나를 아무 때나 부려먹을 생각은 마시오. 옆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해드릴 수는 있지만 두 분과 같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흉수를 잡아낸다던가 하는 수고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

“아주 약은 친구로군. 시간이 가다보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

풍철한은 능효봉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함곡과 함께 우리 처소로 돌아갈 생각이네. 자네도 함께 가려나?”

능효봉은 잠시 멈칫했다. 확실히 풍철한은 무언가 알고 있었다. 단지 설중행과 자신의 관계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정말 풍철한이 적이 된다면 매우 곤란할 터였다.

지금 자신들의 처소로 가자는 말은 설중행을 조사하는데 같이 끼겠느냐는 의미도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설중행과 만날 필요가 없었다. 괜히 자신이 모습을 보여 설중행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매우 피곤하오. 더구나 내가 끼면 조사하는데 좀 불편할 것 같지 않소?”

“그도 그렇겠군.”

풍철한은 의외로 순순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또한 능효봉의 말에는 일종의 경고가 담겨 있음을 눈치챘다. 설중행을 조사하는데 억지를 부리거나 모욕을 주지 말라는 의미였다. 자신이 가면 분명 그런 일에 반응을 할 테니 서로의 관계를 생각해 적당한 선에서 설중행을 조사하라는 말이었다. 풍철한은 그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경후의 얼굴에는 기이한 기색이 어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동창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했던 그였다. 헌데 능효봉을... 그것도 매우 은밀하게 사용하고,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비영조의 조장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 하지만 그러한 치명적인 실수는 오늘 여러 가지가 있었고, 그가 느낀 것은 오직 이것 하나였다. 다른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지금까지 완벽했던 그답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더 큰 실수였다.

33

“이 자식이....? 일어나. 이미 깨 있는 것 알아.”

구석에 놓여있는 침상에서 벽을 향해 몸을 구부려 자고 있는 설중행에게 다가가며 풍철한이 소리를 질렀다. 그의 뒤로 함곡과 선화, 그리고 반효가 따르고 있었다. 피로한 모습의 설중행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돌렸다. 얼굴로 보아 잠이 들었기는 들었던 모양이었다. 풍철한의 뒤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자 설중행은 상체를 느릿하게 일으켰다.

“또 뭔 일이오?”

풍철한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설중행이 귀찮다는 듯 물었다. 사실 그는 피곤했다. 다친 상처도 상처지만 그로서는 피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저녁 때 어디 갔었어?”

풍철한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자식을 데리고 돌려가며 말하고 싶지 않았다.

“본래 예의가 없는 놈인지라 보주니 뭐니 하면서 긴장된 상태로 저녁을 먹고 싶지 않았소. 그래서 피한 거요.”

설중행은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왜 따지듯 하느냐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풍철한의 눈은 이미 설중행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벗어던진 겉옷은 아까와 달리 날카로운 것에 몇 군데 베어져 이미 입을 수 없게 되었고, 진흙이 묻어 있었다. 미세하나마 풀잎 물도 배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음에 분명했다.

“저녁은?”
“먹지 못했소.”
“그 자식 죽이는 일이 그리 급했어?”

풍철한의 말에 설중행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풍철한의 뒤에 있는 세 남녀가 자신을 심각하게 주시하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했다.

“누가 죽었소?”
“모른 체 할 거야?”

“정말 모르오.”
“이 자식도 능효봉이란 놈과 똑 같군.”

풍철한이 혀를 차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어디 갔던 거야? 흙도 묻어있고, 풀물이 배어 있으니 야산에라도 올라가서 계집 끼고 뒹군 거야? 아니면 앙탈하는 계집과 싸움이라도 벌인 거야?”

그 말에 설중행의 얼굴에 흠칫하는 표정이 스쳤다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합시다. 별로 말씀드릴 일도 아니오.”

“말해야 될 것 같은데....”

풍철한은 설중행이 앉아 있는 침상에서 솔잎 하나를 집어 들었다.

“죽은 자의 방 창문 아래에 이것과 같은 솔잎이 떨어져 있었지. 흉수는 창문으로 들어왔다고 추정되는데 네 옷에 묻어 있었던 것이 우연일까? 더구나 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네놈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이제 네가 그 시각에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할 수 없다면 흉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흥미롭다는 기색이 역력한 여덟 개의 눈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 하나, 그의 말투에서 뭔가 찾으려는 듯 했다.

“빌어먹을...”

설중행의 입에서 중얼거리듯 투덜거림이 나왔다. 그렇다고 당황하거나 변명할 기색은 전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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