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51회

등록 2006.10.17 08:14수정 2006.10.17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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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죽은 거요? 내가 이곳에서 죽일 사람이라도 있다는 거요?"

"네 입으로 말했잖아. 서교민…. 동창의 서당두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말이야…."


풍철한의 말에 설중행은 매우 놀라고 있었다. 죽은 자가 서교민이었단 말인가? 그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더니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군. 내 손으로 사지를 잘라야 할 놈이었는데…."

설중행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서는 자신이 직접 그를 죽이지 못해 억울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지금 그의 모습이 꾸민 것이라면 그는 아주 교활한 자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가 지금 보이는 태도가 가식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언제 죽었소?"

"이 자식 보게? 그를 죽인 놈은 너 아니면 능효봉이란 놈밖에 없어. 아니면 네놈 둘이서 작당하고 죽였거나…."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해 억울하긴 하지만 나는 죽이지 않았소."

"능효봉을 알지?"


풍철한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확신이 필요했다. 이런 순간에 이런 것을 묻는 것은 정말 풍철한이 노련한 인물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설중행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잠시 풍철한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소. 동료였으니까…."

귀찮은 투로 대답했다. 더는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풍철한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역시 예상대로 설중행은 동창의 비밀조직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설중행과 능효봉은 동료들을 이끌고 혈간 옥청천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는 철기문 구천각 인물들에 의해 쫓기며 동료를 모두 잃고 두 녀석만 살아남아 이곳으로 스며든 것이다.

"여기에는 무슨 의도로 들어온 거야?"

풍철한의 뚱딴지같은 소리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은 것은 설중행 본인만은 아니었다. 뒤에 있던 반효가 더욱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대형이 지금 미치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허… 풍대협이 나를 억지로 데려온 것 아니오? 내가 여기 오고 싶다고 했소? 아니면 데려다 달라고 했소?"

"뭔가 있지?"

풍철한의 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반효가 보기에 풍철한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설중행의 말대로 부상당한 그를 데려다가 치료해 놓고는 무조건 데려온 것이다. 그런 그에게 왜 이곳에 들어왔고, 무슨 목적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네놈은 내가 데리고 들어오지 않았어도 다른 방법으로 이곳에 들어올 놈이었어. 나는 멍청스럽게…, 아니 내 성격을 자연스럽게 이용했다는 것이 옳은 말이겠지. 주제넘게 참견하길 좋아하는 나는 네놈과 같이 내력이 불분명한 자를 보면 끝까지 알고자 하는 못된 성격이거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누가 내 일에 참견하라고 했소? 아니면 부상당한 나를 치료해 주고 무조건 억지를 부리라 했소?"

"너 이곳에 온 것이 처음은 아니지?"

풍철한의 질문은 두서가 없었다. 이것을 찔러보다가 갑작스럽게 다른 쪽을 찌르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대답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교묘한 조사방법 중 하나였다.

"……!"

처음으로 설중행이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긍정의 의미였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풍철한을 직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풍철한과 함곡은 설중행의 성격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설중행은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거짓말에 서툴러 거짓말을 하기보다 입을 다무는 성격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보인 모든 태도와 행동으로 보아 그는 서교민을 죽인 흉수가 아니었다. 독룡아의 반점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겨드랑이를 살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대답하기 싫으면 대답하지 마. 헌데 정말 어디 갔다가 온 거야?"

철한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아까 풍대협이 정확하게 지적하지 않았소? 풍대협의 말대로 야산에 가서 계집 끼고 뒹굴었소."

설중행의 말투에는 짜증과 심통이 섞여 있었다. 그 말에 풍철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그렇다고 사내자식이 삐지기는…."

아무도 계집 끼고 뒹굴었다는 설중행의 말은 믿지 않았다. 심통이 나서 그저 해 본 말일 것이라 생각했다.

"피곤하오. 이제 더 물을 것이 없으면 나는 자야겠소."

설중행은 힐끗 함곡과 그의 여동생 선화를 보고는 다시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얼굴을 벽면으로 향했다. 그것을 보고 있는 풍철한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에 반해 함곡의 얼굴은 조금씩 자신도 깨닫지 못한 채 심각해져 가는 것 같았다.


34

용추는 긴장하고 있었다. 독룡아는 운중보주가 확인했듯이 진짜였다. 그렇다면 자신이 모시는 만보적 상만천이 위험해 질 수 있었다. 재차 자신이 직접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 오늘 같은 밤에는 낯선 곳의 첫 번째 밤인 만큼 매우 위험해질 수 있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상만천이 운중보를 오겠다고 결정한 것은 나흘 전이었다. 수개월 전부터 이곳에 올 것인지에 대해 뚜렷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던 상만천이, 더구나 자신의 거처를 떠나기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가 왜 이곳에 오기로 최종 결정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철담 하후진이 죽었다는 소식이 그를 움직이게 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수개월 전부터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준비해왔던 용추는 결정이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 오기 전까지 나흘 동안 자신의 머리를 모두 짜내어 완전하고 안전한 거처를 만들기 위해 준비해왔던 모든 사항을 점검했다.

다행스럽게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운중보의 구조를 먼저 파악하고 적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이 연무장이란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더구나 넓은 연무장은 망루 세 개만 세우면 침입하는 자들을 모두 파악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상만천의 곁에는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두 명의 귀신들이 은밀히 존재해 상만천을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있을 것이고, 그가 머무는 거처를 중심으로 오장 이내 방원에는 미세한 소리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호위 다섯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머지 열 명 정도는 쉬고 있지만 잠을 자면서도 그들의 손에는 언제나 무기가 들려있을 터였다.

상만천의 거처와 주위를 둘러본 용추는 망루를 바라보았다. 구름이 끼어 있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빠져 있는 주위는 너무 고요했다. 망루에는 두 명씩 한 조가 되어 주위를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은밀하게 잠입한다 해도 그들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숙수나 가정, 시녀들도 되도록 눈과 귀가 밝은 자들을 선발하여 데리고 왔다. 일류고수는 아닐지라도 주위에 머물고 있는 그들의 눈을 피해 상만천의 거처로 들어오기에는 낙타가 바늘구멍 뚫고 들어오는 것만큼 어려웠다. 설사 들어온다 하더라도 자신이 전각 배치나 인원 배치로 일종의 진을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상만천을 찾지 못하고 뱅뱅 돌거나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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