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49회

등록 2006.10.13 08:32수정 2006.10.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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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곡의 태도는 이곳에 도착할 때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용추의 등장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지 않나 생각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제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번 사건을 해결할 모양이었다.

"능대협!"


함곡이 갑작스럽게 능효봉 쪽으로 몸을 돌렸다. 능효봉은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함곡에게 과장스럽게 눈을 크게 치켜떴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이었다.

"능대협은 창문으로 들어왔다가 창문으로 나갔다고 했소."

"분명하오."

"그렇다면 홍교란 시녀에게 서당두의 호출을 전해들은 것이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은 것이오?"

"나는 홍교란 시녀가 누군지 모르오. 이목구비가 동글동글한 아이라면 그녀가 맞소."


"서당두가 죽어 있었소?"

"그렇소."


"헌데 왜 창문으로 들어왔소?"

당연한 질문이었다. 아직까지 그 질문을 하지 않고 빙빙 돌린 이유는 그의 말에 전혀 허점을 발견할 수 없어 결정적인 질문을 할 기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능효봉은 힐끗 경후를 바라보았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동창의 비밀이 새게 마련이었다. 그것을 막아 달라는 의미였는데 경후는 의외로 가만히 있었다.

"어쩔 수 없구려. 나는 서당두와 해결할 일이 있었소. 아니 그가 죽어있지 않았다면 내 손으로 죽였을지도 모르오. 그런 의도가 있는 사람이 방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겠소? 다행스럽게 창문은 열려 있었고, 나는 쉽게 창문을 통해 들어올 수 있었소."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더구려."

"그런 것은 기본이오. 나는 그 방에 있는 어떠한 것도 건들지 않았고, 유일하게 서당두가 독룡아에 당한 흔적을 자세히 살폈소. 그리고는 창문을 통해 빠져나왔소."

"왜 그를 죽이려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오?"

"서당두와 나와의 문제요. 그런 내막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소."

능효봉의 말에 풍철한이 끼어들었다.

"자네만의 문제는 아니지. 서당두를 죽이려 마음먹은 사람은 자네 말고 또 한 명이 있지. 그렇지 않은가?"

풍철한의 여유 있는 모습에 함곡은 자신이 모르는 내용을 풍철한이 알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 분명했다. 능효봉은 대답을 하지 않고 풍철한의 표정을 살피며 곤혹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지금 이곳에서 서당두를 죽이고 싶어한 자는 자네 아니면 그 녀석이야. 쉽게 둘 중의 하나라는 말이지."

능효봉의 얼굴에서 지금까지 여유 있는 표정이 사라지고 칼날 같은 검미가 치켜 올라갔다.

"그 녀석은 아니오."

"네놈이 아니라면 그 녀석밖에 없잖아?"

풍철한이 으르렁거리자 능효봉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긴장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경고하겠소. 만약 당신이 그 녀석을 옭아맬 생각이라면 당신은 반드시 죽게 될 거요. 서당두보다 더 처참하게…."

"이 자식이!"

풍철한의 주먹이 갑작스럽게 능효봉의 얼굴을 향했다. 비록 내공이 별로 실려 있지 않은 주먹이라 위력은 강하지 않았지만,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그 주먹은 능효봉의 얼굴에 닿기 전에 막혔다.

능효봉의 손바닥이 그의 턱 옆에서 날아온 주먹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본 좌등과 경후의 얼굴색이 변했다. 분명 그들은 풍철한의 주먹이 능효봉의 턱을 가격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막거나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내놓으라 하는 고수들이었지만 너무나 급작스럽고 기쾌한 풍철한의 주먹을 자신들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풍철한과 능효봉의 시선이 허공에서 끈적하게 엉켜 들고 있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얼굴색이 약간 상기되는 듯했다. 풍철한의 주먹과 능효봉의 손바닥이 허공에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과는 달리 서로 내공을 끌어올려 힘을 겨루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양쪽 다 한 치의 밀림도 없었다.

풍철한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피어오르자, 능효봉 역시 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순간 그들은 동시에 한발자국씩 물러났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좌등의 얼굴에 어둠이 깔렸다. 들었던 것보다 풍철한은 대단한 고수였다. 거기다가 동창의 일개 번역 정도 되는 인물로 보았던 능효봉 역시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는 고수였다.

사실 내력을 겨룸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조금이라도 밀리면 그 자리에서 피를 쏟고 즉사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팽팽한 가운데 그것을 멈추게 하려면 두 사람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내력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했다. 헌데 이들은 스스로 멈췄다. 그것은 스스로 내력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경지에 올라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주먹을 함부로 휘두르지 마시오. 이번은 그 녀석을 이곳으로 데려온 수고로 참겠소."

어느새 능효봉의 표정은 다시 능글맞은 웃음을 띠며 세상을 조롱하는 듯하게 변해 있었다. 그것은 풍철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가 장난스런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 녀석, 바로 그 녀석이 이 작자의 치명적인 약점일지도 몰랐다.

"그 녀석과 밖에서는 어떤 관계일지 모르지만 이 안에 들어와서는 내 일행일 뿐이야. 내가 그 자식을 어떻게 하던 내 마음이야. 하지만 자네의 충고는 받아들이지. 자네 같은 사람을 적으로 돌릴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으니까…."

풍철한의 말은 상대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풍철한이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는 아주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그 말에 능효봉은 웃었다. 능글맞은 웃음이 아니라 매우 유쾌한 웃음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요. 세상에 광검을 적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소?"

"도와주겠나?"

풍철한의 은근한 물음에 능효봉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떡였다.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거요. 내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내 궁금증을 푸는 일이기도 하니 해보겠소."

"왠지 맘에 드는 말이군. 그럼 이번 사건의 해결을 위해 무엇부터 해야 옳을까?"

"그거야 함곡선생과 풍대협이 전문 아니오? 다만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함곡선생의 말씀대로 서당두를 왜 죽였느냐 하는 걸 거요."

모든 살인사건의 기본은 흉수의 살해 동기다. 동기를 알아낸다면 이미 그 사건의 절반이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함곡이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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