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파 영수'는 대원군이 아닌 박규수?

한문학자 김명호 "개화파 박규수, 1871년 신미양요 전까지 척화파였다"

등록 2006.10.19 17:29수정 2007.08.03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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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미관계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의 한미관계는 물론이고 과거의 한미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구한말 시기 박규수(朴珪壽, 1807~1877년)의 위상을 재조명하려는 입장을 언급할 수 있다.

기존의 통념에 따르면, 박규수는 구한말 시기 '개화파의 영수'였다고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작년에 발행된 김명호 저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은 이러한 기존의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새로운 연구성과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1866~1871년 시기 조선-미국 교섭과정을 박규수를 중심으로 분석한 이 책은 비록 한문학자가 쓴 책이기는 하지만, 박규수를 중심으로 초기 한미관계를 다룬 책이라는 점에서 역사학계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끌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시기부터 박규수가 이미 근대사상(개화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종래의 연구성과다. 예컨대, 김용구 저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처럼 "박규수가 1866년에 미국과 조약을 체결해야 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다.

이러한 통설에 맞서, 한문학자 김명호는 구한말 시기의 각종 문헌들을 근거로 하여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시기까지의 박규수는 대원군과 마찬가지로 척화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증거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김명호는 종래의 통설에서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박규수의 편지 1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다.

종래의 통설에서는 박규수가 아우인 박선수에게 보낸 다음 편지를 주요 근거로 제시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예의지방(禮義之邦, 예의의 나라, 인용자 주)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이러한 주장이 고루하다고 생각한다. 천하만고에 어찌 나라를 다스리면서 예의가 없는 경우가 있겠는가?"


통설은 이 편지를 근거로 하여, 박규수는 '어느 나라나 예(禮)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박규수가 서양국가들도 예의의 나라라고 인식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통설에 대해 김명호는 "이러한 문구 어디에서도 박규수가 개화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직접적 증거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서양국가에게도 예가 있음을 강조한 게 아니라 조선이 더욱 더 예를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김명호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1871년 신미양요까지의 박규수는 대원군과 똑같은 척화론자였으며, 그의 인식이 근대사상(개화사상)으로 바뀐 것은 1872년 제2차 연행(燕行, 베이징 여행) 이후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위 부분까지의 논의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다. 박규수의 근대사상이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설 대립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김명호는 1871년까지의 박규수를 대원군과 똑같은 척화파였다고 규정하면서, 이 시기의 한미관계에 있어서 대원군보다는 박규수가 더 높은 역량(주로 지적 측면)을 갖고 있었으며, 또 주요 고비에서 조선의 위기를 방어한 것은 대원군이 아니라 박규수라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개화파의 영수'였던 박규수를 '실질적인 척화파 영수'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박규수가 대원군보다 더 탁월한 척화론자였다는 근거로서 김명호가 제시한 여러 가지 측면 가운데에 3가지만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866년 대동강에 침투한 제너럴셔먼호를 격침한 것은 대원군의 뜻이 아니라 평안감사 박규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제너럴셔먼호 섬멸 계획을 보고한 박규수의 1866년 7월 22일자 장계(狀啓, 보고서)에 대해 조선 정부가 승인 공문을 발송한 것은 7월 25일인데, 제너럴셔먼호는 이미 그 전날인 7월 24일 박규수의 명령에 의해 격침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원군의 승인이 평양에 도달하기 전에 제너럴셔먼호는 이미 박규수의 명령에 의해 대동강 수중으로 좌초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박규수가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로 조선의 대미관계에 적극 관여하였고 신미양요 시기에 조선이 작성한 몇몇 외교문서(미국봉합전체자·미국병선자요자)도 박규수가 기초했다는 주장이다.

셋째,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당시 조선의 유명 시인인 조면호(趙冕鎬)가 그의 시에서 '박규수는 달식과 지략으로 시대적 요구를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주장들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각각의 주장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

첫째, 제너럴셔먼호 격침을 과연 박규수의 뜻이라고 볼 수 있는가? 격침 승인에 대한 조선 정부의 승인 공문이 격침 다음 날에 평양감영에 도착한 것을 근거로 하여 과연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을까?

과거나 현재나 지방에서 발생한 급박한 비상 사태 하에서는 현지 지방관이 고도의 재량권을 갖는 것이 원칙이다.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을 위협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중앙의 승인이 내려오지 않았다 하여 이를 격침시키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잘못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승인 공문이 오기 전에 제너럴셔먼호를 격침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 반대로 승인 공문이 없다 하여 격침을 늦추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사실, 제너럴셔먼호가 평안도 수계(水界)를 침범한 그 순간부터 평안감사 박규수는 그 선박을 격침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현행범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현지 지방관이 그러한 급박한 사태 하에서 제너럴셔먼호를 격침하였다고 하여 그것이 중앙의 의사에 반대될 리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박규수가 격침 계획을 사전에 중앙에 보고했다는 점이다. 그 보고에 대한 승인이 내려오지 않았더라도, 제너럴셔먼호가 인명 살상 등의 행위를 저지르는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선참후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박규수는 분명히 중앙에 사전보고를 했으므로, 이런 점을 근거로 박규수가 단독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은 식의 논리를 전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원군 자신도 현지 지방관의 재량권을 인정한 바 있다. 당시 황해감사에게 보낸 서한에서 대원군은 "해당 수령이 스스로 판단하여 (서양 선박에게) 대답하더라도 (나는) 필시 이의가 없을 것"이라면서 "거리가 수백 리나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매번 조정의 지시를 받는다 말이요?"라고 말했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박규수가 중앙의 승인이 내려오기 전에 제너럴셔먼호를 격침한 것은 박규수와 대원군의 갈등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며, 박규수가 대원군보다 더 탁월한 인물임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닌 것이다.

둘째, 박규수가 초기 조·미 교섭에서 몇몇 외교문서를 기초한 것을 근거로 하여 박규수를 이 시대 대외관계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물론 외교문서 작성에서 그가 보인 활약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이는 분명히 그가 당시의 대외관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붓을 들고 외교문서를 기초하는 사람과, 붓을 들지 않고 외교문서 작성을 지시하는 사람의 관계에서 과연 전자가 후자보다 더 상위의 인물일까? 이는 비서와 사장의 관계를 생각하면 얼른 이해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셋째, 19세기의 유명 시인인 조면호는 과연 박규수를 '시대적 요구를 갖춘 인물'이라고 극찬하였을까? 조면호의 문집인 <옥수집>에 의하면, 조면호는 박규수를 가리키면서 "달식경위수세자(達識經緯需世姿)"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문학자인 김명호는 이 표현을 "달식과 지략으로 시대적 요구를 갖춘"이라고 번역하였다. 위 한문 문구 가운데에서 '世姿'를 '시대적 요구'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중국 시집인 <전당시> 권190에 나오는 위응물(韋應物, 737~804년)이라는 시인의 시에서는 '세자(世姿)'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원산림의 고요한 정취를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한 당나라 때의 위응물은 이 시에서 "천생일세자(天生逸世姿)"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천성적으로 세상살이를 싫어하여'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다.

만약 여기서 '세자(世姿)'를 '시대적 요구'라고 보면, '천성적으로 시대적 요구를 싫어하여'라는 이상한 해석이 나온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세자(世姿)'라는 표현은 '세상적 기준' 혹은 '세상적 바람' 등의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다. 아무리 확대 해석한다 해도, '시대적 요구'라는 의미가 거기서 도출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유명 시인인 조면호가 박규수를 가리켜 '시대적 요구를 갖춘 인물'이라고 했다는 주장은 박규수를 띄우기 위한 과욕에서 비롯된 착오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1871년 신미양요 이전의 정국에서 박규수가 대원군보다 더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1871년까지의 박규수가 개화파가 아니라 척화파였다는 주장은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871년 이전의 상황에서 척화파 박규수가 척화파 대원군을 실질적으로 능가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구한말 상황에서 척화와 개화 중에서 어느 쪽이 바람직했는가 하는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척화가 진행되던 1871년 시기에 대외관계 부문에서 박규수가 대원군보다 더 탁월했다는 주장을 입증하려면 보다 합리적인 증거의 제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학계 일부의 논의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한미관계 전환기라는 지금 시점에서, 초기 한미관계를 재해석하고 또한 그로부터 바람직한 인간상을 도출하려 하는 시도는 분명 바람직하고 희망적인 시도일 것이다. 한미관계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며, 그와 관련하여 역사 속의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노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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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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