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군복, 부끄러움뿐인 정훈

[내 젊음을 바친 군대 19] 노동자·학생·광주시민 매도... "부끄럽습니다"

등록 2006.10.25 16:50수정 2006.10.2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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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2월 24일 오후, 조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손수 운전해 대구에서 88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로 달렸다. 모처럼 아들과 딸이 서울에서 내려와 네 식구가 함께 여행하니 즐겁고 행복했다. 그때만 해도 자가용 자동차가 흔하지 않았다. 애들 보는 데서 운전 실력도 뽐낼 겸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차를 몰았다.


그늘진 곳에는 아직 눈이 덮여 있었고, 눈 위에 차들이 지나가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 위는 빤질빤질한 곳이 많았다. 눈발은 계속해서 날리고 있었다. 다른 차들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눈길 운전이 위험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나는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내 차는 미끄러운 눈길에도 염려할 것 없는 세계적 명품이라고 선전하던 OO사의 새 타이어로 4개 모두 갈아 끼웠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다른 차들을 제치고 신나게 달렸다. 약간 경사진 길을 한참 오르다,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그러나, 아뿔싸! 바퀴 방향만 오른쪽으로 돌려졌을 뿐 차는 그냥 관성대로 미끄러져 직진했다.

중앙선을 넘어 도로 왼쪽에 있는 알루미늄 가드레일을 '탁' 치더니 붕 떠서 언덕 밑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차가 도로를 벗어나 가드레일을 무너뜨리고 넘어질 때 아내는 이미 "이렇게 죽는구나"하며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난 그래도 참전용사의 기를 살려 계속 소리를 질렀다. "꽉 잡아라! 꽉 잡아!" 차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뒤집히더니, 한 바퀴 두 바퀴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강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지,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애들도 쥐죽은 듯 아무 기척이 없었다. 나 같은 것을 부모라고….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도 이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a 교통사고 차량.

교통사고 차량. ⓒ 표명열

내 이름 새겨진 피 묻은 군복 버릴 수 없다던 아내

차 구르는 소리만 적막한 가운데, '이렇게 속절없이 가는 인생인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절대 선이고 악인 양 그토록 악을 쓰며 버둥대며 살았나'하는 허무한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무엇보다 고생만 시키면서도 늘 큰 소리로 야단만 쳐온,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정훈이, 딸 재원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 아주 빠르게 굴러가지 않고, 갈수록 둔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구르는 것이 큰 낭떠러지는 아닌 듯싶었다. 여섯 번을 굴러가다가 '들썩들썩' 구를까 말까 하더니 더 이상 구르지 않고 멈췄다. "가만히 그대로들 있어라!" 소리소리 지르며 내가 맨 먼저 나온 다음, 찌그러진 차체에서 애들을 꺼냈다.

아들놈은 얼굴에 큰 상처를 입어 유혈이 낭자했다. 딸아이는 손등과 얼굴 등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한 아내는 한참만에야 정신이 돌아와, 맨 나중에 나왔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우리 얼굴을 바라보며 '이제 곧 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내는 이 일 때문에 지금도 고개가 많이 아프다.


a 고속도로 밑으로 굴렀던 장소.

고속도로 밑으로 굴렀던 장소. ⓒ 표명열

정신을 차린 다음, 미끄러졌다 일어섰다 하며 비탈길을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경사가 심한 데다 마른 풀에 눈이 쌓여 있어 계속 미끄러졌다. 가까스로 고속도로가 있는 길까지 올라갔다.

아내는 급경사를 올라오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졌다. 내려다보니, 내 군복과 모자를 양팔로 안고 오느라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아 고생하고 있었다. "그까짓 군복 내버리고 와! 뭐 그리 보물단지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에는 군인의 길 하나밖에 없는 양 날마다 악써 날뛰며 살아온 내 모습이 아내를 저렇게 만들었구나! 내가 오죽 심하게 굴렀으면 이 상황에서 그놈의 군복이 무엇이기에 저렇게 가져와야만 하는가!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이 그지없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피 묻은 군복이지만 계급장과 내 이름이 거기 붙어 있어 차마 버려두고 올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아들은 전남대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얼굴을 수십 바늘 꿰맸다. 그 후 성형수술해주기 전까지 아들은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잘 들지 않았다. 또 지금도 자가용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 아예 운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 날 이후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으로 완전히 새로워질 것을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그 때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옛날과 다름없이 계속 성질 급하고 자주 화내는,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

파병 반대·국보법 폐지 주장하다 제명... 정훈 명예 더럽혔다?

이렇게 죽음을 넘나든 난 6개월여 후 드디어 병과의 최고 수장인 정훈감 자리에 올랐다. 난 특기가 정훈으로 바뀐 다음에는 주로 육군본부에서 정신전력 강화 연구에 몰두했다. 야전에서 사단참모로 근무한 경력도 있지만, 청와대와 육군본부에 파견 나와 정신전력 이론체계를 세우고 정신전력학교를 만드는 등 난 거의 서울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정훈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부끄러움뿐이다. 정훈장교들은 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그 길만이 살 길이라고 열을 올리며 박정희 우상화에 앞장섰다. 전태일 노동 열사가 호소할 길 없는 가련한 근로자들을 위해 몸을 불살랐을 때, 우리는 '이 나라 노동계는 빨갱이들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다'며 목에 핏줄을 세웠다.

청년 학생들이 민주화를 위해 정의의 횃불을 들고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우리는 '빨갱이들의 조종을 받고 있는 철부지들'이라고 매도하며 대학생 병영훈련에서 정신교육을 강화한다고 우국충정(?)에 불탔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처절하게 투쟁한 광주시민들을, 우리는 '간첩의 조종을 받는 폭도들'이라고 매도하며 제5공화국의 탄생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선거 때마다 독재정당에 몰표가 가게 하기 위해 '시국관 확립'이라는, 안기부에서 내려준 교재로 순회교육을 다녔다. 우리는 보안사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앵무새처럼 떠들었다. 완전 거짓으로 조작된 '김대중 그는 누구인가'를 전 장병, 전 군인 가족에게 완전한 진실인 양 30년 가까이 끊임없이 강조하며 진실을 호도하는 데 앞장섰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정훈병과 출신 예비역 간부 중엔 아직도 냉전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몇 년 전, 그들은 나를 제명했다. 이라크 파병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대북 적대의식 교육중단 등을 주장한 게 정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였다. 부끄러운 내 과거를 그들이 씻어 주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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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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