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61회

등록 2006.10.31 08:10수정 2006.10.3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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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은 흉측했다. 과연 이것이 사람의 시신일까 의심스러웠고, 더구나 어제까지만 해도 그의 말 한마디면 고위관리들뿐 아니라 조신들조차 벌벌 떨게 하였던 신태감의 육신인가 싶었다. 나무로 만든 욕조 위로 반쯤 고개를 내밀고 싶었는데 얼굴뿐 아니라 온 몸도 잘 삶은 돼지비계처럼 허옇게 변해 있었고, 곳곳에 심하게 수포가 터질 듯 부풀어 올라있었다.


"………!"

아무리 무공을 익힌 무림의 여걸이라지만 함곡의 동생 선화는 신태감의 시신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왔다.

"저희들이 게으름을 피웠나 봅니다."

함곡이 운중보주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함곡 일행이 청룡각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지만 많은 인물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 사건은 정말 운중보가 생긴 이래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다.

"어제 무척 피곤했을 텐데 이른 시각에 깨워 미안하네. 하지만 보다시피 어쩔 수 없었네."


아직 부스스한 얼굴을 보이고 있는 풍철한을 보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풍철한은 시선을 신태감의 시신에 고정한 채 주위사람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저러한 모습은 무언가 그의 뇌리를 스치는 환영을 보았을 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과연 그의 뇌리로 어떠한 환영이 떠올랐던 것일까?

함곡이 그를 보다가 툭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풍철한은 계면쩍은 미소를 띠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직 잠이 덜 깨서…."

풍철한은 운중보주에게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변명하듯 말꼬리를 흐렸다. 풍철한의 표정으로 보아 아주 기이한 환영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운중보주는 그를 채근하지 않았다. 그제야 풍철한은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운중보주의 뒤에는 첫째 제자인 잠룡검(潛龍劍) 장문위(蔣文偉)와 다섯 번째 제자인 미환검(美幻劍) 추교학(萩矯學)이 서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문 장문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입을 열 것 같지 않은 태산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 반해 여인처럼 곱상하게 생긴 추교학은 둥근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슬프고도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찌 보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는 듯도 했다.

더욱 가관인 인물은 동창의 첩형인 경후였다. 그는 동공이 풀린 채 넋이 나가 있었다. 밤새도록 한잠도 자지 못한 듯 눈이 부어 있었고,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 변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늙어보였다. 그의 옆에는 번역(番役) 직책을 가진 동창 소속의 하종오(河宗悟)가 서 있었는데 그 역시 절망스런 기색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운중보주가 함곡과 풍철한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미 운중보주는 사인(死因)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터였다. 지금 그의 질문은 그들의 조사를 도와주기 위함이라는 것쯤은 두 사람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끔찍할 정도군요. 어떻게 당했기에 이런 지경인지 모르겠습니다."

풍철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원한이 하늘에 닿았다 해도 이토록 끔찍하게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이것은 도검으로 난자하는 것보다 끔찍했고, 잔인했다.

"자넨 정말 어떻게 당했는지 몰라서 묻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묻는 것인가?"

운중보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풍철한을 보고 있었는데 마치 풍철한은 내심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그러나 풍철한은 표정을 변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둘 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정도의 열양공(熱陽功)을 익힌 인물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순간에 욕조의 물을 펄펄 끓여 한 점 남기지 않을 정도라니요."

"이미 알아보았군."

운중보주가 고개를 끄떡였다. 풍철한은 이미 신태감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욕조에 들어있는 상태로 욕조의 물이 순식간에 끓어오르면서 몸 전체가 통째로 삶아져 죽은 것이다. 그때였다. 운중보주의 대제자인 잠룡검 장문위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말투가 흘러나왔다.

"화룡(火龍)의 염화신공(炎火神功)……!"

그것뿐이었다. 한순간에 욕조의 물을 펄펄 끓게 하고, 수증기로 변하게 할 무공은 초열지옥(焦熱地獄)의 염화(炎火)를 온 몸으로 뿜어낸다는 구룡(九龍) 중 화룡의 무공밖에는 없었다. 이미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사실 확신이 없어 풍철한이 자신의 입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벌써 과거 구룡(九龍) 중 독룡(毒龍)의 독룡조(毒龍爪)에 이어 두 번째로 구룡의 무공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운중보주를 포함한 동정오우에게 패해 사라졌던 무공이 운중보에서 연달아 나타난 것은 확실히 예삿일이 아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터지고 있는 것이다.

좌중은 한동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구룡의 무공을 직접 본 인물은 오직 운중보주 뿐이었다. 하지만 전설처럼 들었던 구룡의 무공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은근히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렇듯 가공할 염화신공을 누가 당해낼 수 있을까?

"흠…, 누가 발견하신 것이오?"

한참만에 헛기침과 함께 함곡이 입을 열었다. 그 물음에 경후와 함곡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던 하종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젯밤 첩형께서… 그 이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으셨는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경후는 정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명석한 두뇌와 예리한 판단력이 있던 경후도 신태감이 끔찍하게 죽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허나 경후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말하기 싫은 것이다. 모든 것이 귀찮고 두려울 뿐이었다. 함곡은 경후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다.

대신 함곡은 천천히 물도 없는 욕조에 누워있는 신태감의 흉측한 몰골을 자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 사인은 온몸이 펄펄 끓는 물에 데어 죽은 것이지만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풍철한은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흉수의 이동이나 흔적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두 사람은 호흡이 척척 맞았다.

"물론 치우거나 흐트러뜨린 것은 없겠지요?"

형식적으로 하종오를 보고 물은 말이었다. 하종오는 고개를 끄떡였다.

"첩형께서 부르셔서 본관이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소."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흉수가 화룡의 무공을 사용하는 자라면 흔적이 남아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다만 창문이 열려 있었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 함곡이 풍철한을 불렀다.

"자네… 이게 무슨 흔적인지 알아볼 수 있겠나?"

함곡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세 군데였다. 신태감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목 부위의 천정혈(天鼎穴)이었는데 그곳에는 수포 사이로 시커먼 피가 굳어 있었다.

"지풍(指風)을 맞은 흔적 같군. 죽기 전에 누군가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것 같네."

사실 수포 때문에 금방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신태감의 온 몸에는 그 흔적뿐 아니라 검이나 도에 베인 상처도 꽤 있어 보였다. 풍철한이 다시 자세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죽기 바로 전에 생긴 상처들 같은데…, 이런 상처라면 싸움이 치열했을 게 분명하네. 하지만 이 안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군. 더구나 이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주위 사람들이 무슨 소리라도 들었을 텐데…."

신태감의 몸에 난 상처들로 미루어보면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허나 이 안은 전혀 싸운 흔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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