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밭에 심은 상추는 서방님 밥상에만 올린다?

[음식사냥 맛사냥 97] 먹었다 하면 잠이 스르르 쏟아지는 '상추'

등록 2006.11.03 15:50수정 2006.11.04 11:00
0
원고료로 응원
a

오늘 저녁, 가족들과 함께 상큼한 가을 상추쌈 어때요? ⓒ 이종찬

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채소는?

21세기 접어들어 웰빙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도심 곳곳에 쌈밥집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다. 쌈밥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유기농법으로 기른 여러 가지 채소를 손바닥 위에 푸짐하게 깔고 삼겹살, 밥과 함께 싸먹는 건강쌈밥이 있는가 하면 잎 넓은 채소 위에 밥과 독특하게 만든 쌈장을 함께 얹어 한 입 가득 싸먹는 다이어트쌈밥도 있다.

쌈도 두 종류다. 텃밭에서 거둔 채소를 흐르는 물에 씻어 파릇파릇한 그대로 싸먹는 쌈이 있는가 하면 가볍게 살짝 삶아 싸먹는 쌈도 있다. 그중 상추, 쑥갓, 깻잎, 케일, 치커리, 질경이, 신선초 등은 날것 그대로 육고기나 생선회 등과 함께 싸먹는 쌈이지만 호박잎, 머위잎, 아욱, 피마자잎, 양배추 등은 살짝 삶아서 양념장과 함께 싸먹는 쌈이다.

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채소가 상추다.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어온 상추는 예로부터 불면증과 두통, 스트레스 죽이기에 으뜸가는 음식이었다. 상추쌈을 많이 먹으면 잠이 잘 온다는 이야기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이 때문에 옛날 사람들이 상추쌈은 저녁에 먹는 채소라 불렀다.

상추,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새 봄에 텃밭에서 파릇파릇 돋아난 상추가 가장 향긋하고 부드러운 줄 알고 있다. 하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가을에 텃밭에서 갓 따낸 상추는 이른 봄의 상추보다 향기가 적고 조금 거세지만 깊은 맛이 숨어있다. 첫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따먹는 가을 상추는 봄 상추보다 훨씬 상큼한 감칠맛이 배어져 나온다.

'자연산 비아그라'라 불릴 정도로 정력에 좋은 상추

a

텃밭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상추 ⓒ 이종찬

a

가을 상추는 상큼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좋다 ⓒ 이종찬

조선 후기의 학자 성호 이익(李翊, 1629~1690) 선생은 <성호사설>에 "채소 중에서 잎이 큰 것은 모두 쌈으로 싸먹는데 그중 제일은 상추쌈"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중국 명(明)나라 때 본초학자(本草學者)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엮은 약학서 <본초강목>에는 "상추는 산모의 젖이 많이 나오게 할 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신, 곧 정력에 좋다, 상추가 집안 텃밭에 얼마나 많이 심어져 있느냐에 따라 그 집 마님의 음욕을 저울질하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고 적어놓고 있다.

이는 상추가 남성들의 정력에도 아주 좋다는 말이다. 하긴, 오죽했으면 옛말에 '상추를 서마지기 반이나 하는 년'이라는 말이 있었겠는가. 오죽했으면 옛 아낙네들이 상추를 집안 뒷마당 담벼락 밑, 그러니까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이 잘 띄지 않는 텃밭에 심어 사람들 몰래 은근슬쩍 남편에게 먹였겠는가.

옛말에 '고추밭 이랑에 가꾼 상추는 서방님 밥상에만 올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아마 남성을 상징하는 고추와 상추잎을 따면 뽀얀 젖 같은 액체가 나오는 것에서 비롯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또한 바로 이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상추를 '자연산 비아그라'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리라.

"문디손! 넘사시러바 죽것네"

a

밭에서 나는 비아그라로 불리는 상추 ⓒ 이종찬

a

상추는 성질이 차고 맛이 쓰며 오장을 편안하게 한다 ⓒ 이종찬

"옴마! 요새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기 억수로(많이) 어지럽다. 그라고 밥을 묵지 않아도 늘 배가 부른 기 이상타."
"니, 동무들하고 들과 산에 자꾸 쏘댕기쌓더마는(돌아다니더니) 또 뭘 잘못 묵었기에 그라노? 그라이 아무 열매나 막 따묵지 말라 안카더나? 퍼뜩 앞산가새(앞산비탈) 밭에 가서 상추 좀 따온나."
"뭐 할라꼬예? 올 저녁 밥상에 또 상추쌈 올릴라꼬예?"
"니 믹일라꼬(먹이려고) 안 그라나."


1960년대 끝자락,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이 머리가 아프다거나 배가 더부룩하다고 하면 앞산가새 다랑이밭에 심어둔 상추잎을 소쿠리 수북하게 따다가 도구통(절구통)에 절구로 콩콩콩 찧어 상추즙을 내 마시게 했다. 그렇게 며칠 상추즙을 마시다보면 어느새 머리통증이 사라지고 입맛이 돌아왔다.

나는 어릴 때 빈혈이 제법 심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학교운동장에 모여 아침조례를 했다. 나는 그 아침조례가 몹시 싫었다. 아니, 두려웠다. 어떤 때 교장선생님께서 다른 날에 비해 긴 연설을 할 때면 갑자기 눈앞에 노란 별이 반짝거리면서 폭 고꾸라지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께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쓰러지는 것이 몹시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근데,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와 마악 소를 몰고 사립문을 나서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불렀다. 그리고 무슨 국물을 한 사발 주시며 쭈욱 마시라고 했다. "문디손! 어지럼증이 있으모 진작 옴마한테 말해야 될 거 아이가, 넘사시러바(남보기 창피해) 죽것네".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가을 상추쌈이나 한번 싸먹어볼까?"

a

상추는 밭에서 따내 물에 씻어 쌈장과 함께 그냥 싸먹으면 된다 ⓒ 이종찬

a

텃밭에서 직접 기른 상추가 가장 싱싱하면서도 상큼해서 맛이 좋다 ⓒ 이종찬

우리나라가 낳은 탁원한 명의 허준(許浚, 1546~1615) 선생이 지은 <동의보감>에 따르면 상추는 성질이 차고 맛이 쓰며 오장을 편안하게 한다고 적혀 있다. 이어 상추는 "가슴에 막혔던 기를 통하게 하고 치아를 희게 하는 것은 물론 피를 맑게 하며 해독작용을 해 술을 자주 마시는 사람에게 좋다"고 되어 있다.

요즈음 상추는 계절에 관계없이 나온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텃밭에서 직접 기른 상추가 가장 싱싱하면서도 상큼해서 맛이 좋다. 상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삼겹살이나 생선회를 먹을 때 쌈으로 싸먹는다. 하지만 상추는 쌈뿐만 아니라 상추겉절이, 상추튀김 등으로 조리해 먹어도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지난 일요일(10월 29일) 오후 5시. 가을해가 마산쪽 하늘로 떨어지며 창원 시내 곳곳에 고운 빛깔의 노을을 발갛게 칠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큰딸 푸름이(15)와 작은딸 빛나(13)가 상추쌈을 먹고 싶다고 했다. 외할아버지께서 서리가 내리기 전에 상추를 따먹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으래. 그러면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가을 상추쌈이나 한번 싸먹어볼까?"
"아빠! 삼겹살도 함께..."
"삼겹살? 그동안 일요일마다 상추쌈에 삼겹살은 많이 싸먹었잖아."
"그래도."
"상추의 상큼하고도 부드러운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삼겹살보다는 된장이나 멸치젓갈에 싸먹는 것이 좋아. 오늘은 그렇게 한번 먹어보자."
"알았어. 그 대신 다음 주 일요일에는 꼬옥 삼겹살 구워줘야 돼?"


"니가 상추맛을 알어?"

a

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채소가 상추다 ⓒ 이종찬

a

양념된장에 쌈을 싼 상추쌈 ⓒ 이종찬

그날따라 텃밭을 물들이는 가을노을이 유난히 붉었다. 장인 어르신께서 틈틈이 가꾸는 텃밭에는 상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텃밭 한 켠에는 마악 씨를 뿌린 듯한 고랑이 또 하나 있었다. 그 고랑에 쪼갠 대나무가 아치처럼 꽂혀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장인 어르신께서 올 겨울에 먹을 상추씨를 뿌린 듯하다.

쪼르르 뒤따라 나온 작은딸 빛나에게 상추 잎 따는 법을 가르쳤다. 빛나는 상추 잎을 따자 하얀 젖 같은 게 뿜어져 나오는 게 그렇게 재미있는가 보다. 이윽고 빛나와 함께 싱싱한 상추를 바구니 가득 따서 집으로 들어서자 푸름이가 "아빠, 얼른 씻어 하나 줘 봐" 한다. "니가 상추맛을 알어?" 하자 "할아버지 밭에서 딴 상추는 맛이 달라" 한다.

오후 6시. 향긋한 내음이 나는 상추를 거의 다 씻어가고 있을 때 두 딸들이 냉장고 문을 몇 번이나 여닫는다. 얼른 밥을 지으라는 뜻이다. 햅쌀에 검은쌀과 보리쌀을 적당히 섞어 물로 깨끗이 씻은 뒤 압력밥솥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불을 켠다. 그때 두 딸들이 배가 고파 죽겠다는 듯이 밥상을 미리 펴놓고 수저까지 가지런하게 놓는다.

"아빠, 나는 된장에 상추쌈을 싸 먹을래."
"아빠, 나는 멸치젓갈!"
"빛나 니가 멸치젓갈의 맛을 어떻게 알아?"
"엊그제 할아버지께서 멸치젓갈에 상추쌈을 몇 번 싸 주셨는데 정말 맛있었어."
"푸름아! 너가 왜 빛나보다 키가 작은지 알아?"
"왜에에?"
"빛나는 뭐든지 가리지 않고 잘 먹잖아. 너도 편식을 하지 않으면 금방 빛나 키를 따라잡을 수 있어."


a

멸치젓갈에 쌈을 싼 상추쌈 ⓒ 이종찬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부는 11월 가을 저녁, 향긋하고 부드러운 상추쌈 어때요? 붉은 빛 감도는 싱싱한 상추쌈 참기름 부은 양념된장에 하나 싸서 귀여운 딸의 입에 넣어주고… 연초록빛 감도는 싱싱한 상추쌈 폭 삭은 멸치젓갈에 하나 싸서 아내의 입에 넣어주고…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 절로 우러나지 않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큰 사랑을 받았던 <음식사냥 맛사냥>은 100회로 끝냅니다. 이어 새로운 음식연재 <맛이 있는 풍경>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과 질책 기다립니다.      

※이 기사는 '시골아이', '시민의신문', '유포터', '씨앤비'에도 보냅니다.

덧붙이는 글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큰 사랑을 받았던 <음식사냥 맛사냥>은 100회로 끝냅니다. 이어 새로운 음식연재 <맛이 있는 풍경>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과 질책 기다립니다.      

※이 기사는 '시골아이', '시민의신문', '유포터', '씨앤비'에도 보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게 뭔 일이래유"... 온 동네 주민들 깜짝 놀란 이유
  2. 2 3일마다 20장씩... 욕실에서 수건을 없애니 벌어진 일
  3. 3 팔봉산 안전데크에 텐트 친 관광객... "제발 이러지 말자"
  4. 4 참사 취재하던 기자가 '아리셀 유가족'이 됐습니다
  5. 5 공영주차장 캠핑 금지... 캠핑족, "단순 차박금지는 지나쳐" 반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