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68회

등록 2006.11.09 08:12수정 2006.11.0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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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이 지금 이 시각에 이곳에 있으려면 적어도 인시(寅時) 정도에 일어났어야 할 것이고, 일어난 목적이 이곳을 오고자 한 것이라면 이미 이곳에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 좌등 자신이 보고를 들은 시각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자신보다 먼저 알고 있어야 가능했다.

어떻게 그리 빠르게 윤석진이 죽은 사실을 알았던 것일까? 가능성은 여러 가지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윤석진의 죽음에 상만천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상만천이 이 운중보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보다 더 소상히 알고 있을 것이란 점이었다.


첫 번째 이유라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는 짓이었다. 조사해 나간다면 밝혀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라면 매우 심각했다. 운중보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자신보다 운중보 내에서 일어난 사건을 빨리 알 수 있다면 이 운중보 내에 상만천의 간세(奸細)가 스며들어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사소한 정도의 인물이 아닌 자신과 버금가는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단순히 하나 둘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두 여자를 잡고 꼬치꼬치 캐낼 입장도 아니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보주가 상만천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시집 안 간 처자들로서는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거늘 그냥 지나치지 그랬소?"

두 여자를 생각해 주는 말인 듯했다. 허나 자꾸 나가려는 그녀들을 조금이라도 이곳에 잡아두려는 의도 역시 없지는 않았다. 자꾸 말을 시키다 보면 분명 조그만 실마리라도 나오는 경우가 많다. 허나 상교교는 더욱 고혹적인 미소를 띠었다.

"궁금한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호기심에 못 이겨 들어왔지만 금세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려던 참이에요."


그녀는 좌등의 의도를 알았든 몰랐든 걸려들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어서 이 자리를 피하려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그녀보다 먼저 상민민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상교교에게 분명한 의도를 전달해 주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더니 배가 몹시 고프군요."


그녀 역시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좌등에게 인사를 하고는 교구를 돌렸다. 그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풍철한이 불쑥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이상해."

혼자 말로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모두 들으라고 한 말이 분명했다.

"도대체 자네는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마치 이미 입을 맞추어 놓은 듯 함곡이 물었다. 풍철한은 그 질문이 나오길 기다린 듯했다. 하지만 함곡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좌등의 앞에 아직도 공손한 자세로 서 있는 강충이란 인물에게 물었다.

"사건이 일어난 후에 이곳에 온 사람들이 저 여자들 외에 또 있었소?"

묻기는 했지만 이미 확신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없었소이다."

강충은 좌등의 눈치를 잠시 살피다가 대답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대답도 하지 않고 무시했을 테지만 좌등과 같이 왔고 보주가 철담의 사인에 대한 조사를 두 인물에게 시켰다는 말은 이미 들었던 터였다.

"역시 옛말에 틀린 말이 없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군."

고개를 끄떡이며 또 다시 중얼거리는 풍철한을 보며 정말 모르겠다는 듯 함곡이 퉁명스레 핀잔을 주었다.

"원 사람도…, 도대체 분명하게 말을 해야 할 게 아닌가? 뭐가 이상한지…. 또 틀린 말이 없다니 뭐가 틀리지 않은 것인지 알아듣게 말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냔 말일세."

답답한 듯 말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풍철한의 내심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변하지 않았고, 그 사실은 이미 어제 반나절을 같이 보내면서 확인했다. 그럼에도 함곡은 시침을 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들른다는 말 말일세."

이 말은 확실히 도발적이었다. 방문을 향해 몇 걸음을 옮기던 상교교가 드디어는 참지 못하고 교구를 홱 돌렸다. 이미 강충에게 저 여자들 운운하며 말을 할 때부터 심상치 않음은 느끼고 있었다. 결국 자신이 나가기 전에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 본녀를 흉수라 몰아대는 것인가?"

감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흉수로 몰다니…. 이것은 모욕이거나 아니면 희롱이었다. 저 자식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바보란 말인가? 상가(商家)의 딸이라고는 하나 지부대인은 물론 관속(官屬)들도 쩔쩔매는 터다. 뿐이랴. 무림방파의 장문인들도 자신에게는 지금껏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직 나이도 어린 것이 혀가 짧구나. 성깔머리도 더러운 것 같고…."

풍철한은 빙그레 웃으며 꾸짖듯 말했다. 이미 치켜 올라간 상교교의 아미가 더욱 역팔자로 치켜 올라가며 표독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언니…!"

상민민이 급하게 상교교의 소매를 잡으며 흔들었다. 저 중년인의 말이나 행동은 뻔한 수작이었다. 언니를 도발시켜 그것을 기화로 이곳에 자신들을 잡아두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교교가 발작을 하려는 것이다.

"이것 놔…, 저런 작자를…."

그 순간이었다. 살과 살이 마주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얼굴이 왼쪽으로 홱 돌려졌다.

쨕--!

뒤늦게 들어오다 상교교 일행에 가까이 있던 능효봉이 어느새 상교교 앞에 서 있었다. 언제 손을 쓴 것일까? 상교교의 왼뺨에는 서너 개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나이 어린 계집이 정말 싸가지가 없구나. 아무리 돈이 썩어나가는 집에서 태어났다고는 하나 세상 사람 모두가 냄새 나는 네 집 가정(家丁)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능글거리던 능효봉의 모습은 어디 가고 서릿발 같은 위엄을 가진 목소리였다. 그의 눈에서 조롱하는 듯한 기색이 섞인 살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이… 이… 감히…."

상교교는 너무나 돌발적이고 치욕적인 사태에 말을 잇지 못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재차 능효봉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년의 입에서 한마디라도 욕설이 나온다면 나는 앞으로 네 년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짓뭉개 놓을 것이다. 어디 감히 알량한 집안의 위세로 존장을 무시한단 말이냐?"

그 순간이었다. 능효봉의 뒤에 서 있던 설중행의 입에서 나직하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만있는 게 좋다. 움직이다가는 다칠 수 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설중행의 시선은 느릿하게 상교교와 상민민을 거쳐 천정을 향하고 있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잠깐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설중행의 시선을 받은 상민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엇일까? 마치 비수가 자신의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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