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67회

등록 2006.11.08 08:18수정 2006.11.08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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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꼴 보기 좋게 죽었군."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의 입에서 저렇듯 표독스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의 화복(華服)을 걸쳤는데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이어서 여자의 선연한 굴곡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었다. 바로 상만천의 딸인 상교교(尙嬌嬌)였다.

"아리따운 아내를 얻은 지 채 일년도 안 지났는데 무슨 짓을 한 건지…."

안타까운 듯 말끝을 흐리며 상민민(尙慜慜)이 고개를 돌렸다. 같은 핏줄을 받은 두 자매지만 말하는 투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생김새 역시 언뜻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기도 했지만 서로 가지고 있는 기질이 달라서인지 보는 이에 따라서는 두 자매가 닮았다는 생각을 가지기 어려웠다.

상교교는 활짝 핀 장미 같았다. 마치 온 세상을 향해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며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향기를 뿌리고 있는 듯 했다. 더구나 요염했다. 그녀의 몸은 향기만큼이나 고혹적인 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천박스러움이나 경박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반해 상민민은 등황색의 계화(桂花)를 연상케 했다. 작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답고 고아하게 보이는 계화의 기질은 그녀의 은근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한 말인 것 같았다.


헌데 그녀들은 어찌하여 이 이른 새벽에 이곳에 온 것일까? 더구나 호위도 없이 단지 네 명의 시비들만 대동하고서? 그녀들이 이곳에 올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사내란 다 그래. 언제 삼처사첩(三妻四妾)을 마다하는 거 봤니? 계집이 조금 암내를 풍긴다 하면 두 눈이 시뻘게지면서 달려드는 수캐와 다름없지."


벌거벗고 죽어있는 두 남녀를 경멸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상교교 역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들어오자마자 세심하게 보았던 터였다. 더 이상 특별히 주시할 것도 없었다. 침상을 치워 그 아래를 보고는 싶었지만 앞뒤가 꽉 막힌 듯한 운중보의 경비는 누구라도 침상 곁 일 장 이내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해도 그는 들은 척 하지 않았다.

"가자…. 우리가 범인을 잡을 것도 아니고…. 훗…."

그러다 문득 상교교는 말을 하다말고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짧은 교소를 터트렸다. 아무리 난잡한 모습으로 죽어있다고는 하나 시신이 있는 곳에서 웃는다는 것은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기분이 좋다는 듯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소식은 빨리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 호호…, 그 계집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만 해도 십년 묵은 체중이 내려가는 것 같네…."

"언니…!"

보다 못한 상민민이 부르자 상교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년을 두둔하려고 하는 것이냐? 천기(賤妓) 몸에서 태어난 주제에 감히 내 뺨을 때린 년이야."

"그래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나는 빚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야. 더구나 알 만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모욕을 받고 내가 그냥 넘길 줄 알아? 이건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 그년을 철저하게 짓밟아 줄 거야."

상교교의 목소리가 올라가며 얼굴이 더욱 표독하게 변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나 언니는 남을 용서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녀는 남의 것에 욕심을 내었다. 자신의 방안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 노리개였지만 모양이 약간만 다른 것이라면 시비가 하고 있는 싸구려 노리개에 욕심을 내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여러 식구들 앞에서, 절대 언니라 인정하지 않는 여자에게 뺨을 맞았으니 참는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 당시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부친의 눈치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평생 그 일을 잊을 그녀가 아니었다.

"시작이라니?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도 마. 마치 언니가 일을 벌인 것같이 들리잖아?"

상민민이 타이르듯 말하자 상교교는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그걸 말이라고…."

동생의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누가 언니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겨우 두 살 차이라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자신과는 다르게 동생은 고아한 기품을 갖추기 시작했다. 사려가 깊고 분별력이 뛰어나 자신과는 달리 웃어른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한 아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시기하거나 심히 미워한 적은 없었다. 유일하게 배(腹)가 같은 형제는 오직 저 아이 하나였고, 자신을 가장 많이 이해해 주는 사람도 저 아이였다. 상교교는 뭐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동생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것은 밖에서 여러 개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곧 이어 십여 명이나 됨직한 남녀 일행이 실내로 들어섰다. 바로 함곡과 풍철한 일행.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가운데 사내들이 들이닥치자 상교교가 걸음을 옮기며 재촉했다.

"가자. 더 볼 것도 없고…."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자신과 동생을 보고 침을 질질 흘리는 사내들 모습이란 은근히 즐기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언제나 귀찮았다. 더구나 돈 많은 부친으로 인해 아예 노골적으로 달려드는 사내들도 많다보니 성가신 것도 사실이었다.

상민민과 시비 네 명 역시 상교교를 따라 발걸음을 떼었다. 지금까지 목석처럼 현장을 지키고 있던 강충이 황급하게 방 입구로 움직였다.

"속하 강충, 좌어른을 뵈오이다."

풍철한과 함곡의 뒤를 따라 들어서는 좌등을 보자 태산이 무너져도 움직일 것 같지 않은 강충어었지만 황급히 좌등에게 다가서며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태도였다.

"자네가 있었군. 밤을 꼬박 새웠을 텐데 수고가 많네."

"별 말씀을…. 발견된 시각은 묘시(卯時) 초. 상난(祥蘭)이란 아이가 최초 발견했고, 발견된 그대로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미 보 내의 책임자가 오면 보고할 말을 준비한 듯 평소 말수가 적은 강충은 빠르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좌등은 손을 살짝 들어 강충의 말을 제지했다.

"되었네. 보고는 천천히 듣기로 하지."

말과 함께 좌등은 걸음을 옮기는 상교교와 상민민을 보며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상대인의 금지옥엽 두 분이 아니시오? 헌데…."

주인 된 도리로서 가볍게 인사하는 듯 말끝을 흐렸지만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 겨우 동 튼 시각이다. 이십 전후한 여자들은 대개 잠이 많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을 시각이 분명했다. 더구나 여자가 움직이려면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세수부터 화장은 물론 옷을 입는데도 족히 반 시진 정도는 잡아먹는 것이 여자들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인내심이 깊은 사내라도 여자와의 외출은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무적신창 좌등어르신이군요. 상교교가 인사드려요."

여자의 표정은 여름날 날씨와 같다. 무더운 가운데 바람이 부는가 싶으면 폭우가 쏟아지고, 언제 비가 내렸다는 듯 개는 것과 같이 상교교는 언제 표독스런 기색을 보였느냐는 듯 아찔할 정도의 고혹스런 미소를 지었다. 상민민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살짝 예를 갖춘다.

"상대인의 두 따님이 강남 최고의 미색을 다툰다더니 헛소문은 아니었구려. 헌데 이리도 이른 시각에 이곳엔 웬일이시오?"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아직 나이 어린 두 여자가 이 시각에 이곳에 있음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과찬의 말씀을 해주시니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녀들은 본래 새벽잠이 없는 관계로…. 더구나 잠자리가 뜨다보니 깊이 잠들지 못해 뒤척거리다 새벽 산책을 나왔는데 우연하게 잠시 들른 것뿐이지요."

대답은 그럴 듯 했지만 변명이라는 사실은 이 자리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여자는 화장이나 몸단장에 목숨이라도 거는 것 같은 이상한 취미를 가진 존재들이라 집밖을 나서려면 적어도 반 시진 이상 허비를 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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