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방에서는 집주인이 '법', 참고 따르라

세렝게티 옥탑에 서식하는 봄날 꼬냥이의 리얼 다큐멘터리 ②

등록 2006.11.13 09:19수정 2006.11.1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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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렝게티 옥탑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 박봄이

세렝게티 옥탑에는 무서운 맹수가 있다. 지구상에서 멸종된 공룡이 다시 살아서 세렝게티 옥탑으로 온다 해도 이 맹수에 맞설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 이 맹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그리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수많은 이들 위에 군림했던 바로 '집주인'이기 때문이다.

누가 말했던가, 집주인 유세가 아들 가진 유세에 버금간다고. 집주인도 아닌 세입자, 그리고 아들내미도 아닌 딸내미인 꼬냥이는 그야말로 이 세렝게티 옥탑방에서 유세떨 거라곤 개뿔 없는 초식동물, 가련한 톰슨 가젤과 마찬가지다.

배추도사 할배를 처음 만난 건 부동산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목동, 단순히 벼룩시장을 보고, 다른 동네에 비해 집값이 싼 편이고 동네도 깨끗하다는 평을 듣고 찾았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걷다걷다 무작정 찾아 들어간 부동산에는 무 도사와 같이 인자하고 순박한 인상의 할배가 있었고, 난 무작정 들이대며 집을 내놓으라 생떼를 썼다.

"할배요, 할배요, 집을 내놓으시오, 넓고 넓은 서울땅에 나는 할배를 만나기 위하여 목동까지 기어들어왔소."
"처자, 처자, 보시오, 가진 건 개뿔없는 젊은 처자가 왜 그리 당당하시오. 보증금도 벌써 반이나 깎았지 않소. 요즘에 그 돈으로 무슨 방을 얻는단 말이오."

그렇다. 난 이미 무 도사 할배가 제시한 기본 최하 보증금을 반이나 깎은 상태에서 '반지하는 싫다' '집주인 집에 방 하나 딸린 그런 구조도 싫다' '개도 두 마리나 있다, 집은 깨끗해야 한다'를 외치며 '집을 찾아보라'고 거의 협박 수준으로 무 도사 할배에게 보채고 있었던 것이다.

장장 한 시간 가량의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고 기력이 쇠하여 거의 녹다운이 된 무 도사 할배는 요구르트 엉덩이를 쪽쪽 빨고 있는 스물여덟의 막무가내 처자에게 완전히 지친 듯 어딘가로 전화를 하셨다.

"여보게, 배추 도사, 자네 집 옥탑 사람 들어갔는가, 여기 젊은 처자 하나가 집을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하이. 자네 돈도 많은데 보증금 좀 깎아보시게."

바꿔, 안돼, 버려, 막혀!!! 전쟁은 시작되었다

처음 배추도사를 만났을 땐 맹수의 야성이 숨겨진 것을 몰랐다. 보증금도 깎아줘, 아침마다 마당청소 매일 해 줘, 뭐든 고장나면 말만 하라 친절하셔…. 이건 뭐 지상낙원인 줄 알았던 게지. 난 당당히 세렝게티 옥탑방에 입성하여 마치 선구자인 양 행복에 겨워했다.

그러나 짐도 다 풀고 빼도박도 못하게 자리를 잡은 약 일주일 후 아침 6시.

"새댁!!!!!!!!!!!!!!!!!!!"

새벽 4시까지 일을 하고 막 잠이 든 꼬냥이를 깨운 건 군대 기상나팔 소리처럼 우렁찬 배추 도사의 고함. 반쯤 감긴 눈으로 운동복만 걸친 채 머리는 처녀귀신 꽃다발을 한 모습으로 뛰어나갔다.

"에…? 왜 그러세요?"
"밤새 개가 쌌잖여, 아침부터 일어나서 바로바로 치워."
"제가 자느라고 밤새 싼 건 못 치웠어요."
"자는 게 문제여! 시간 시간마다 치우란 말이여."

개가 시간 정해놓고 싸는 것도 아니고…. 어련히 치울라고.

"개털 날리믄 옥상 하수구 막혀, 하수구 막히면 돈 수십 들어, 개털 깎아줘."
"개똥은 변기에 버리면 병균 옮아, 쓰레기통 여기 뒀으니께, 모아서 버려."
"옥상 문은 위에만 잠가, 내가 계속 왔다갔다 하는데 아래는 열쇠가 없어."
"밤에 불 켜놓지 마, 전기료 많이 나와." (그럼 낮에 켜리)
"집세는 어떻게 된겨, 오늘 집세 날이잖여. 밀리지마." (아침 6시거든요!!)
"개도 두 마리 키우니께, 수도료는 2인분으로 내. 내가 개 한마리 분은 깎아준 거여."

참고로 배추 도사가 계속 언급하는 하수도는 옥상의 하수도를 말하는 것으로써, 사방에 4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크기가 가히 사람 머리 하나 들어가고도 남을직한 크기이다. 복댕이 삼식이가 조금 풍만하고 건장하긴 하지만 거기서 털이 빠진대도 얼마나 빠진다는 것인가.

그러나 내 말했지 않는가, 나는 힘없는 톰슨가젤 꼬냥이라고. 그날 바로 복댕이 삼식이의 털을 박박 밀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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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털을 밀어버리니... 데리고 다니기 부끄러웠다. 미안, 복댕. 히히. ⓒ 박봄이

배추 도사 은혜는 하늘 같아서...

가련한 세입자 꼬냥이의 법칙 1. 집주인이 하라는 건 일단 다 하고 본다. 열 가지의 항목을 원하면 어렵지 않은 여덟은 다 하고, 큰 무리수가 따르는 두 가지는 앞의 여덟 가지를 내세워 버텨본다. 협상의 법칙이다.

어르신들 가운데에는 동물을 싫어하는 분들이 많은지라 우리 배추 도사의 말에 대부분 따르기로 했다.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들어왔을 거라고!!! 난 당당히 외칠 수…없다. 이사가 절박했으므로.

그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고 세렝게티 옥탑에선 또 그 법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좋게 좋게 깔끔하고 원칙주의 배추 도사에게 맞춰주기로 마음을 굳게 먹은 꼬냥이. 뭐 생각해 보면 다 나쁜 건 아니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올라와서 있지도 않은 먼지를 물청소하는 덕에 옥상 바닥을 맨발로 뛰어도 먼지 한점 안 묻는 집이 이 서울 시내에 어디 흔한가.

집세 하루라도 밀리면 한 시간에 한 번씩 전화하고 올라와서 닥달해주니 보증금 까먹을 일 없지 않은가. 이 또한 어린 꼬냥이의 미래를 생각해주시는 배추 도사의 은공이 아니던가.

아침 6시만 되면 올라와서 부스럭거리는 통에 꼬냥이 또한 아침 6시만 되면 기상을 하게 되니 남들 그 어렵다는 아침형 인간이 자연스레 실천되는 것이 아닌가.

배추 도사 심장이 안 좋아 옥상에서 걸어다니면 깜짝깜짝 놀라신다는 덕에 조신한 발걸음으로 생활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꼬냥이의 여자다움을 증가시켜 주는 것이니 이 아니 고마울쏘냐. ('뭐, 옥상에서 마루 체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배추 도사 심장은 깃털로 만들어졌나' 하는 불손한 생각을 안해 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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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달리하여 찾아온 평화. 끼룩! ⓒ 박봄이

아, 생각해보니 배추 도사의 은혜가 낳아주신 부모님 다음으로 큰 은혜라, 말 잘 들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불끈! 하게 된다.

중간중간 이해 안 되는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뭐 어떤가. 세상사 이런 집 하나 못 얻어 길거리에 나앉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살던 집이 하루아침에 헐려 온 식구가 죽니 사니 하는 세상인데, 이 정도 번거로운 일쯤이야 감수하고 살아야지.

옛말에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는데 배추 도사도 집도 깨끗해지고 꼬냥이도 잘 되라는 의미로 저러는 것이라고 '일단' 생각은 해보고 싶다.

안되면 콱!

더 참아야지, 뭐~

꾹, 꾹, 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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