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집안의 '만주진출'을 설명하고 있는 <수당 김연수>의 목차. 밑줄 친 부분이 '만주진출'에 관한 것이다.<수당 김연수>
이처럼 일본이 조선의 논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기에 김성수 집안은 밭보다는 논에 주력하였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고객'의 의중을 간파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일제의 경제정책을 활용한 합리적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성수 집안이 일본에 안테나를 맞추고 있었다는 점은 그 집안이 '만주진출'에 나섰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만주진출'이란 표현은 이 집안에서도 사용되는 표현이다.
만주국이 세워진 뒤인 1936년 3월 김성수의 친동생인 김연수가 삼양사의 거점을 만주에 마련한 것도 그 한 가지 예가 된다. 이후 만주에는 이 집안이 만든 천일농장 등이 세워지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경로인 조선-만주는 김성수 집안의 사업 경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점만 갖고는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다. 돈을 벌기 위해 정치권력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경영자로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집안 사람들이 개항 이후로 일본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성수 집안 사람들이 심리적 안테나를 일본에 맞추고 있었다는 것, 이점은 다음 4편부터 소개할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둘째, 김성수 집안의 농업경영은 '인간 경영'이라고 하기에는 2% 부족했다. 서두에서 제기한 바 있듯이, 이 점은 김성수의 겨레 사랑을 검증하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김성수가 객관적으로 친일파이고 또 그의 집안이 일본자본주의에 편승해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그와 그의 집안 사람들이 조선 농민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었다면 김성수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었다. 조선 농민들을 배려했다는 점이 입증되면, 객관적인 친일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를 민족주의자 혹은 휴머니스트라고 부를 가능성이 존재한다.
김용섭의 논문에 의하면, 1923년경을 기준으로 할 때에 김기중·김성수·김재수 3부자 명의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민은 총 1978명이었다. 웬만한 대기업을 연상케 하는 규모라 하겠다. 그런데 그 소작농민의 과반수는 경작 토지가 3단보(段步)에도 못 미치는 영세농들이었다. 일반적인 소작 규모보다도 적은 규모였다.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씨 3부자가 소작인을 수시로 교체하였다는 점이다. 1918~1924년 기간 동안 김씨 3부자의 토지 2053필지 중에서 6년간 소작인의 변동이 없었던 것은 845필지에 불과했다.
그 외의 대부분의 땅에서는 소작인이 수시로 교체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김씨 집안의 소작인들은 고용불안을 겪은 것이다. 이처럼 김씨 3부자는 소작인을 수시로 교체함으로써 소작인들의 충성을 이끌어내는 한편, 소작 조건을 한층 더 악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소작인이 땅을 잃는 것은 생명을 내놓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소작인을 수시로 교체하였다는 점에서 김성수 집안의 인간관(人間觀)의 일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리 이윤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그처럼 냉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씨 집안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의 소작인들도 그 당시에는 다 힘들었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김성수는 일반 지주와 달리,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며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었다. 또 그는 훗날 부통령까지 지낸 사회의 지도층이었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농업 경영에 대한 판단 역시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김성수 3부자는 농업관리인(마름)도 수시로 교체하였다. 1918·1923·1924년의 경우를 보면, 김씨 3부자의 땅을 관리하는 마름은 총 38명이었다. 그런데 1918~1924년 시기에 그 지위를 그대로 유지한 사람은 12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마름들은 수시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물론 기업 경영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지만, 김성수의 집안에서 이처럼 소작인과 마름의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뒤집기 어려운 사실이다. 김성수 집안은 합리적인 경영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민족주의적인 휴머니스트가 되기에는 2%가 부족하였던 것이다.
민족주의자라는 증거는 어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