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75회

등록 2006.11.20 08:15수정 2006.11.2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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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담이 죽음을 당한 이후로 그들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흉수가 누군지 조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정식으로 보주가 자신과 풍철한에게 이 사건의 조사를 맡기자 마음이 급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급하게 서두르려 했던 것일까?

“무슨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함곡의 이 말은 ‘흉수가 누구요?’ 하는 백도나 풍철한의 질문과 다를 바 없다. 단지 교묘하게 자신은 빠지고 남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격이다. 귀산노인 역시 그 의도를 알면서도 더 이상 딱 잡아떼지 않고 말을 돌렸다.

“노부가 뭐라 대답할 수 있었겠나? 멍청스런 질문에 해 줄 말이 무에 있어?”

함곡 너 역시 멍청스런 질문을 했다는 말이다.

“순순히 물러나던가요?”

나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


“보주가 흉수가 아니냐고 따지고 들더군. 아니라고 잘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했지. 보주라면 그렇게 ‘나 흉수요’ 하고 흔적을 남길 인물이 아니라고 말이야. 더구나 그 녀석들 뿐 아니라 자네들 역시 보주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어.”

자신을 찾아 온 성의를 보아 백도나 쇄금도에게 해주었던 답변 정도는 해주겠다는 태도. 함곡은 이렇게 해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방향을 달리 하기로 했다.


“마침 보주님 말씀이 나오니 여쭈어 보아야겠습니다.”

“무엇을? 함곡께서도 보주가 흉수가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신 겐가?”

“배제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제가 여쭈려 하는 것은 그게 아니고 보주가 어떠한 분이냐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묻고 싶은 겐가?”

“그저 보주님의 내력, 가문이나 가족들, 구룡의 신화를 종식시킬 적 활약과 운중보에 칩거 한 이후의 일들 말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호기심도 없다 할 수는 없지만 이 사건과 관계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함곡 역시 자신이 들고 있는 봉비를 꺼나 찻잔 옆에 놓았다. 이 질문만큼은 반드시 대답을 듣고자 한다는 의미다. 귀산노인은 잠시 함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인들의 평가가 확실히 과장된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을 풀어가는 데 있어 확실히 맥(脈)을 쥐고 있다.

귀산노인은 좌등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대답을 회피하기는 어렵지만 비껴갈 수 있다면 그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 말이란 한 번 뱉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전달될 수도 있고, 그것으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보주라면 노부보다 좌등 저 친구가 더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을 걸세.”

좌등은 아주 젊은 시절부터 운중보주를 모셔왔던 인물. 좌등이 무어라 하기 전에 함곡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좌선배께서는 보주님에 관한 것이라면 절대 입을 떼지 않을 분입니다. 설사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인정해야 했다. 좌등은 분명 그럴 인물이다. 귀산노인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차를 한 모금 소리를 내어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보주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네. 보주가 젊었을 시절 무림은 매우 혼란한 시기였네. 지방마다 힘깨나 쓴다는 인물들이 출현하고, 수많은 중소방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때였지. 자고나면 영웅이 탄생되고 사라지는 시기였단 말일세. 그런 부류 중 한 명이었다고 보아야 하지.”

전통적인 구파일방의 권위가 추락하고 힘만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기였다. 구파일방 중 일부가 멸문하고 나머지는 어쩔 수없이 봉문을 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구룡은 중원에 우뚝 서기는 했지만 군림하려 들지 않았다. 썩어빠진 구파일방의 권위와 부를 철저하게 응징했지만, 그리고 그 동안 거들먹거리던 대소문파와 무림세가를 손봐주기는 했지만 과도한 욕심에 대한 징벌적인 측면이었다.

그러자 지금껏 기존 세력과 질서에 숨죽이고 있던 인물들이 우후죽순처럼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름이 좀 알려진 인물을 이기고 나면 갑자기 영웅 대접을 받는 것도 이시기였다.

“보주의 친구들인 동정오우 역시 그 당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라네. 하지만 친구들도 마찬가지네만 보주 역시 누구에게 무공을 배웠는지, 더구나 보주는 어느 가문 출신인지 사실 알려진 바도 없네.”

“가족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함곡이 묻자 귀산노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하기 몹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시 젊은 나이에 절세의 가인(佳人)과 혼인을 했네. 아들을 하나 두기도 했지.”

“지금 이곳에는 수양딸만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내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었네. 그것도 누군가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지. 혼인한지 겨우 오 년만이었고, 아들이 걸음마를 시작하던 두 살 때였지. 운중보 뒷산에 크고 작은 무덤 세 개가 있네. 하나는 보주의 가묘이고 나머지 두 개는 처자가 묻혀있는 묘라네.”

비극적인 일이었다.

“누가…?”

“구룡 쪽의 인물에 당한 것이라 알려졌네. 당시 구룡과 동정오우 간의 혈투는 전쟁을 방불케 하던 때였으니까. 그 때까지 소극적이고 언제나 친구들 뒤에 있던 보주가 앞장 서 나선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네. 그리고 그 사건이 있은 지 일 년 반 만에 구룡의 신화는 철저하게 깨져버렸지.”

처자식을 잃은 슬픔과 복수에 대한 염원으로 운중보주는 철저하게 구룡의 신화를 종식시켰을 것이다. 중원 무림인, 특히 잔존한 육파일방과 대소문파는 동정오우, 그 중에서도 구룡의 신화를 종식시킨 운중검 나군백을 열렬히 환호했고, 무한한 존경의 염을 보냈을 것이다.

“보주는 그 때 무림을 떠나려 했지.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네. 무림인들은 구룡이 패해 이 지상에서 사라졌던 동정 군산에다 엄청난 규모의 운중보를 세우려 했다네. 극구 사양하고 무림을 떠나려는 보주가 머물겠다고 한 곳이 이곳 서호였지. 규모도 십 분지 일 정도로 줄였다네. 그리고는 이곳 운중보 공사가 시작되자 일 년이 넘도록 육파일방은 물론 각 대소문파를 들르며 중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돌아왔다네.”

여기저기 한 시대가 탄생시킨 영웅을 모시고자 했을 것이다. 보주 역시 자신의 거처가 완성될 시기까지 중원을 돌아다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는 한 번도 외부에 나간 적이 없네. 제자 다섯과 수양딸 하나. 그리고 친구들이 전부인 사람이네.”

전설적인 영웅의 이야기치고는 너무나 싱거웠다. 구룡의 신화를 종식시킨 이후에는 그럴 듯한 영웅담이나 중원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도 없었다. 지금까지 운중보주에 대해서 알려졌던 내용보다 더 자세한 것도 없었다. 사실 귀산노인이라 해도 더 이상 해 줄 말도 없을 것이다.

풍철한이 잠시 귀산노인을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이 운중보 내에 구룡의 무공을 익힌 인물이 있소?”

중요한 문제였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귀산노인의 태도로 보아 별로 기대를 가지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그게 무슨 말인가?’ 라든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라고 잡아떼면 더 이상 할 말도 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그 질문을 받은 귀산노인의 태도는 좌등의 태도와 같이 애매했다. 똑같은 질문을 했지만 좌등은 매우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보주나 귀산노인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했다. 분명 뭔가 숨기는 것이 있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노부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네. 노부 역시 자네의 질문에 시원한 대답을 할 만큼 자세히 알지 못하네. 보주께 직접 묻든가, 아니면 최소한 동정오우 중 한 사람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네.”

대답은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신중해서 누구라도 뭔가 이에 대한 내막이 있음을 깨닫게 했다. 분명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자신이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좌등과 마찬가지로 함곡은 귀산노인의 태도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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