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77회

등록 2006.11.22 08:19수정 2006.11.22 08:19
0
원고료로 응원
“다행히 기습한 놈들 중 두 명을 사로잡았고, 형님을 모시던 숙수(熟手) 한 사람이 유일하게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이다. 사로잡은 두 놈을 족쳐 어디에 소속된 자들인지만 알아낼 수 있겠지. 더구나 살아남은 숙수가 도망간 놈들의 체형 정도는 기억할 수 있다하니 반드시 잡을 수 있을게다.”

“반드시 잡아내야지요. 잡아 그 놈들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서 돼지 밥을 만들 겁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못내 아쉬웠다. 철담어른의 죽음은 어쩌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사건은 아니었다. 운중보 후계자를 정함에 있어 사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이 친구들인 동정오우다. 그 중 가장 걱정이 되는 인물이 이 운중보 내에 있었던 철담어른이었다.

자신을 밀어준다면 이미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철담어른은 은근히 사매인 궁수유를 미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다시 막내사제인 추교학을 미는 것 같은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그런 불안이 뜻밖의 시해로 인하여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해졌다고 생각했다.

철담이 죽은 이상 특별히 관련이 없는 성곤어른이나 중의어른이야 백부가 부탁하면 자신의 편에 서 줄 분들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자신의 버팀목이던 백부가 죽은 것이다. 정말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것이다.

옥기룡의 말을 듣는 옥청량은 씁쓸했다. 자신의 조카인 이 아이는 오직 하나만 생각하고 있다. 옥청천이 얼마나 이 아이를 애지중지했던가? 가정을 가지지 못한 옥청천은 온 사랑을 이 아이에게 쏟았다. 헌데 이 아이는 변을 당해 돌아가신 형님에 대한 애도나 슬픔은 안중에도 없다. 오직 자신을 밀어 줄 백부가 죽었다는 사실만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고 이 아이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죽은 큰 형님이나 이 아이의 부친, 그리고 자신 역시 이 아이를 그렇게 키웠다. 중원을 한 손에 틀어 쥘 인물을 만든다는 그 목적뿐이었다. 자신이 직접 죽은 형님의 시신을 찾지 않고 급하게 운중보에 온 것 역시 다를 바 없다.


“추교학을 밀기 위해 온 신태감 역시 지난밤 살해됐다. 형님이 돌아가셨다고는 하나 네게 불리해진 것만은 아니다.”

내심 형제를 잃은 슬픔은 뒤로 하고 조카와 이런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자신에 대해 한탄스러웠다. 자신과는 달리 오직 운중보의 후계자가 되기에 혈안인 조카가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그 간 전력을 기울였던 대사(大事)를 이루어 내야 한다. 그것이 또한 죽은 형님의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세 명이 똑같아 진 상황입니다. 사형과 저, 그리고 추교학이 말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서 가장 덕을 본 사람이 사형이지요. 아니 이렇게 되자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 사형이군요.”

이미 셋째 모가두와 넷째 궁수유는 아예 제쳐놓은 듯한 말투였다.

“지금 너는 이러한 사건들이 장문위(蔣文偉) 쪽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관련이 있든 없든 간에 객관적인 상황이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대제자라는 명분도 있겠다…. 더구나 욱일승천의 기세에 있는 화산파마저도 장문위를 밀기로 했잖습니까?”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 간의 진행을 보면 장문위가 대제자라 하나 배경이 시원치 않아 오히려 옥기룡은 물론 추교학에게까지 밀리고 있다고 평가되었던 터였다. 그런 상황이 갑자기 몇 가지 의문의 살해사건으로 장문위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으로 급반전된 것이다.

“철권(鐵拳) 장혁(蔣爀)이 아무리 고집불통 막무가내라 하나 이토록 위험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힘도, 또한 뒷감당할만한 힘도 없다.”

“후계가 되고 나면 모든 힘이 사형에게 쏠립니다. 뒷감당은 여차이지요. 더구나 문제는 구룡의 무공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점 역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숙부도 그 점이 마음에 걸린다. 누가 구룡의 비급을 가져간 것인지, 아니면 정말 구룡의 후인들이 나타난 것인지 모르겠다. 이 숙부로서는 구룡의 비급을 얻은 후 그것을 익히기 위해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자가 드디어 마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두 가지 모두 사형과 연관을 시킬 수 있습니다.”

“구룡의 후인들이 은밀하게 장문위 쪽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냐?”

“만권문(卍拳門)에는 철담어른이나 백부님을 시해할 정도의 인물이 없습니다. 화산파 역시 문파의 존망을 걸고 그런 짓은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결론은 지금껏 모습을 보이지 않던 세력이 움직였다고 보아야 하지요. 물론 그들과 사형 쪽이 손을 잡았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지금 상황으로만 본다면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요.”

그의 말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이십육 년 전 사라진 구룡의 무공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했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이라고 후인을 남겨두지 말란 법이 없다. 또한 그들이 움직이고자 한다면 분명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운중보의 후계자 중 동정오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인물과 손을 잡아야 한다. 또한 가장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선택해서 말이다. 그런 추론이라면 장문위 밖에 없다.

“또 다른 가능성은?”

“지금까지 운중보에 스며들어 구룡의 비급을 얻은 자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가 이제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은밀하게 준비를 해오다가 이제 때가 되자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도 장문위를 택해서 말입니다.”

“그런 자가 움직인다고 해도 장문위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근거 없는 비약이다. 그런 자라면 차라리 궁수유나 모가두를 선택했을 것이다. 나중에 제거하기 더 쉬울 테니 말이다. 구룡의 복수이든 아니면 운중보를 차지하려는 심중이라면 동정오우는 물론 그와 관련된 인물과 손잡기는 쉽지 않을게다.”

“철저한 복수를 위하거나 운중보를 완벽하게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그 자의 목적이라면 반드시 내부인물과 손을 잡았을 겁니다. 그것도 분명 가능성이 높은 인물과 말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 소질이 그 자라면 반드시 장문위를 택해 손을 잡았을 것입니다.”

틀린 분석은 아니었다. 아니 정말 구룡의 후인이거나 아니면 운중보를 무너뜨릴 목적을 가진 자라면,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십여 년이 넘도록 마각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준비해 온 자라면 분명 내부에 동조자를 만들거나 자신의 흉계를 감추고 내부의 적을 만들어 나갔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후계자 다툼이 치열한 이 호기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고, 후계자 중 한 명을 포섭해 분열을 일으키고자 할 것이다.

“곧 형님의 시신을 모시고 단혁(亶爀)이 들어오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올게다.”

“오늘 오전에 들어온다는 것입니까?”

“네 부친이 직접 나섰다. 단혁에게는 일단 형님의 시신을 맡겨 이곳으로 모시게 하였다.”

단혁은 철기문의 구천각(九天閣) 각주로 옥씨 형제들에겐 수족과 같은 존재. 부모가 대대로 옥씨 가문의 가정(家丁)이었던 관계로 단혁은 태어나면서부터 옥씨 가문의 인물이었다. 그의 재질을 알아본 혈간 옥청천이 문무를 가르쳐 철기문의 기둥으로 만들고 실제로도 혈간의 유일한 제자라 할 만한 인물이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움직여 봐야겠습니다.”

“어쩌려구? 장문위와 담판이라도 짓겠다는 것이냐? 네 부친이 들어온 후에 결론을 내고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네 부친 역시 내일 오후면 이곳에 당도할 테니까.”

아직 젊은 옥기룡이 조급한 마음에 일을 더 그르칠 것 같은 기우 때문이었다. 이럴수록 경거망동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상황의 반전이란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추교학을 이용해야겠습니다. 그 녀석 약점이 무언지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얻어야 할 것을 내준다고 약속해야 하겠지만 그것도 나중에 가봐야지요. 지금 그 녀석 역시 신태감이 살해당했으니 당황하고 있을 겁니다. 아깝기는 하지만 그 녀석이 원하는 것을 주고 더 큰 것을 얻어야지요.”

지금까지 자신에게 있어 가장 유력한 경쟁자로 보인 추교학이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신경을 가장 많이 쓰고 견제했던 상대였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그에 따른 대응도 달라져야 한다. 아직까지 불리한 입장은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패를 잃은 이상 이제 자신이 헤쳐 나가야 했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이었다.

자신이 반드시 얻어야 할 것. 그리고 정말 놓치기 싫은 여자를 두고 거래를 해야 하지만 그것도 나중에 두고 볼일이었다. 여자란 것이 준다고 가는 것이고, 빼앗으려 한다고 뺏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주의 딸이란 신분은 언제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였으니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