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속정에 몸 싣고 수면 위를 날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18] 란저우에서 빙링쓰 이르는 길

등록 2006.11.29 13:11수정 2006.11.2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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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의 란저우. 기온 30도. 해발 고도 1500m. 한 낮이 오는 것이 두렵다. 고지대에서도 이러니 사막에 들어갔을 때의 더위는 어떨까? 그래도 간쑤성 깊숙이 험지로 들어서는 시점에서 심리적 안정을 되찾다. 드디어 백구의 예비타이어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까닭이다.

a 황하를 끼고 길게 뻗은 란저우.

황하를 끼고 길게 뻗은 란저우. ⓒ 오창학

시안에서도 같은 종류, 같은 규격의 타이어 구입에 실패하고 걱정이 컸다. 란저우가 간쑤성의 성도이고 중국 서북부 최대 공업지대라고는 하나 척박한 황무지에 길게 위치한 소도시 규모여서 타이어구입에 대해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사방이 온통 황무지니 AT타이어의 구입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이 결실을 얻었다.


철봉씨가 인터넷으로 BF타이어 란저우 지점을 알아내어 연락하고 타이어를 수배한 결과 긍정적 답변을 들은 게 어제. 현재 백구의 발통에 끼워진 BF 255/70R16의 규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사한 BF 245/75R16이 있다는 것이다. AT타이어 계열에서 지름 5mm라면 무시해도 좋을 차이이니 불행 중 다행이다. 이 모든 것이 어제 이동하는 차 속에서 전화로 이루어졌다.

a 드디어 란저우에서 백구의 예비타이어를 달다. 어렵게 찾은 BF 대리점.

드디어 란저우에서 백구의 예비타이어를 달다. 어렵게 찾은 BF 대리점. ⓒ 오창학

란저우를 둘러보는 일은 여정 후반에 내몽고 자치주로 들어서기 전 경유할 때로 미루고 지금은 타이어부터 확보하기로 한다. 그런 다음 예정대로 병령사(炳靈寺:빙링쓰)로 이동한 후 다시 우에이(武威)까지 가면 원래의 일정에 차질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예비타이어를 확보하고 나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다. 사막 횡단을 앞두고 조바심치던 마음이 금세 누그러진다. 이제 달리는 일만 남았다.

란저우를 빠져 나가다가 황하 공원엘 들렀다. 시짱(西藏)자치구에서 발원한 황하가 처음으로 지나는 대도시 란저우 명성에 걸맞게 장마 뒤끝에나 볼 수 있는 일렁이는 황톳물을 직접 접한다. 허베이 나서며 어디선가 보았을 터이고 뤄양 지나오는 길엔 분명히 보았던 그 물을 지금 다시 보고 있다.

내 여정과 꾸준히 함께 한다. 하긴 발해만까지의 5464Km 물줄기에, 면적으로도 중국 면적의 7.8%를 차지한다면 황하가 중국이고 중국이 곧 황하 아니겠는가. 그런 황하이건만 내 다시 이 길을 나서면 둔황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돌아 시닝에 닿을 때까진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a 황하 제일교 '중산교'와 황하 모친상

황하 제일교 '중산교'와 황하 모친상 ⓒ 오창학

일렁이는 물살을 가로질러 1907년 외국자본으로 건설한 황하제일교 ‘중산교(中山橋)’가 걸려있고 그 앞에 황하모친상이 조각되어 있다. 황하는 중국이라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친이라는 뜻? 혹자는 이 석상에서 어머니 같은 황하의 자애를 읽고, 혹자는 범람 없는 자애를 갈구하는 인간의 두려움을 읽는다.

a 과거에 황하를 건너던 양가죽 뗏목. 머리와 네 다리를 자른 양가죽에 공기를 넣어 부력을 얻는다.

과거에 황하를 건너던 양가죽 뗏목. 머리와 네 다리를 자른 양가죽에 공기를 넣어 부력을 얻는다. ⓒ 오창학

양 통가죽 뗏목을 타고 굼실거리는 황하를 건너는 일단의 관광객들이 보인다. 먼 옛날 실크로드를 지나던 사람들은 저 방법으로 황하를 건넜다. ‘양피화지’라 불리는 저 뗏목은 대나무를 얽은 틀에 양의 머리와 네 발목을 떼어낸 통가죽 공기주머니를 매달아 부력을 얻는다. 일엽편주. 굼실거리는 황하를 ‘건넌다’기 보단 ‘떠내려 간다’ 싶게 출렁이며 밀려가는 양가죽 뗏목이 위태위태하다.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을 가자하면 한 번은 반드시 넘어야 하는 강 황하. 수십 장의 양가죽을 붙이면 가축과 말을 운반할 수 있는 뗏목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옛날 실크로드 대상들의 도강로는 이런 깊고 넓은 곳이 아니었다. 조금 더 북쪽, 소나 말이 건널 수 있는 얕은 장소였다. 오늘 가려는 병령사 위치가 바로 그곳이다.

a 황하 공원의 노인들. 예금계좌의 잔고만이 행복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황하 공원의 노인들. 예금계좌의 잔고만이 행복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 오창학

이 구경 저 구경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공원의 분위기가 한국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평일이니만큼 한가한 노인들이 공원의 주역인 것은 한국과 같다. 그러나 노인들의 흥겨운 놀이터로 변한 이곳은 파고다 공원의 삭막하고 암울한 정경과는 거리가 있다.

저마다의 악기를 가지고 나와 꽤 수준 있는 연주단을 구성하기도 하고 어떤이들은 그 선율에 맞춰 흥겨운 춤사위를 즐긴다. 그들의 표정에서 남아있는 날들에 대한 불안과 무기력은 읽을 수 없다. 행복이라는 것. 은행계좌의 잔고만이 필수요건은 아니다.

a 병령사 가는 길. 척박한 모래산에 녹색풀이 보인다. 처절한 산림녹화사업의 결과.

병령사 가는 길. 척박한 모래산에 녹색풀이 보인다. 처절한 산림녹화사업의 결과. ⓒ 오창학

란저우를 빠져 나왔다. 서남쪽 100Km 지점의 병령사를 보기 위해 선착장이 있는 류쟈샤(劉家峽)로 향하는 중. 병령사를 보고 다시 류쟈샤로 나와 우에이(武威)로 향할 것이다. 그래도 우에이까지는 달랑 277Km여서 마음은 편하다.

병령사 가는 길은 모래와 먼지로 이루어진 고봉준령의 척박한 땅이다. 풀 몇 포기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삭막한 풍경이 계속된다. 그나마도 푸른 빛을 볼 수 있는 건 서부대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처절한 산림녹화 노력의 결과 때문이다. 대체 여기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살까.

a 병령사 가는 길에 만난 양치기 사내. 정말 가난이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았으면......웃음이 해맑다.

병령사 가는 길에 만난 양치기 사내. 정말 가난이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았으면......웃음이 해맑다. ⓒ 오창학

11시 20분. 해발 1630m의 반산(半山)을 통과하는데 도로 한 켠을 차지하고 한 무리의 양 떼가 간다. 아, 비로소 서역 땅에 다가서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서역’이라 칭해야 할 지 모르겠다. 햇살에 그을린, 궁기 짙은 얼굴과 허름한 옷매무새의 목동은 사진기 앞에서 순박하게 웃는다.

그에겐 이 한 무리의 양떼가 재산의 전부일지 모른다. 처절한 가난이다. 양 한 마리에 200위안. 한화 2만5000원. 30마리라 쳐도 그가 가진 재산은 75만원이 전부다. 그의 선대에도 그렇게 살았고 그도 그렇게 살고 있으며 어쩌면 그의 후대에도 이렇게 살 것이다.

그러나 양 30마리를 금전 얼마로 치부해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오만한 이방인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60년대의 한국을 본 서구인이 자동차도 냉장고도 없이 살아가는 ‘처절한 가난’을 동정한다면? 그래 자동차와 냉장고가 있으니 퍽도 행복하였겠다, 당시 서구인들은.

정작 그는 양 30마리라도 그로부터 식량을 얻고 가죽을 얻어 한 생을 살다 가면 그뿐이라며 자족해하는지 란저우 도심에 있는 이들과 비교하며 신세를 한탄하는지 속내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사내가 개방화된 주변 현실과 견주며 스스로 힘들어하지 않았으면하는 바람이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해맑게 웃는 양치기 사내의 얼굴이 찡해서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한 구절을 떠올린다. 인생행적이 그 모양인 양반이 시는 어째 이리 가슴을 파는 게야.

한참을 달리는데 GPS의 고도계는 현 위치가 2145m임을 표시한다. 이곳에도 드문드문 황토벽돌집들이 보인다. 농토도 변변한 초지도 없는 이 고원지대에 저들은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일까?

란저우에서 80Km 떨어진 류쟈샤(劉家峽)까지는 약 1시간 만에 도착했는데 유람선 타는 곳 찾다가 세월 다 갔다. 댐 가는 길로 들어섰다가 되돌아오고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고...‘여기가 아닌게벼, 아까 그 산이 맞네벼.’ 백제의 국운을 걸고 출정한 계백이 제대로 황산벌을 찾지 못해 전투에 패했다는 우스개 소리에 등장하는 대사. 이 말을 연신 되뇌이며 웃었다.

a 맛,양,가격이 삼위일체가 되어 흡족했던 류쟈샤(유가협) 선착장 근처 음식점

맛,양,가격이 삼위일체가 되어 흡족했던 류쟈샤(유가협) 선착장 근처 음식점 ⓒ 오창학

그래도 헤맨 덕에 우연찮게 괜찮은 식당을 발견했다. 중국식 자장면과 볶음밥이 일품인 이 집은 밥 큰 그릇이 4원으로 맛과 양, 가격이 모두 환상이다. 겉도 허름하고 실내도 우리네 옛 복덕방 같은 구조인데 썩 괜찮은 점심을 챙겼다. 모두가 인터넷에 알리자고 흥분하는 통에 덩달아 사진 한 컷을 찍는다.

나리님과 자포님은 비슷한 연배이고 같은 2호차 탑승인데다 방 짝꿍으로 연이 닿은 까닭에 따쿵따쿵하며 재미있는 사건을 많이 만들고 다니신다. 자포님이 이 식당에서 생마늘을 먹고 표정을 숨기니 나리님이 냉큼 따라 먹고는 금세 울상이다. 애써 표정을 숨긴 자포님도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만다. 상대를 골탕 먹일 수 있다면 자기희생 쯤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저 불굴의 의지.

이 두 분의 화법도 극명한 특징을 보인다. 예를 들어 음식점에서 입에 안 맞는 요리가 나왔다 하자.

나리식 화법: “음, 맛있어는 보이는데 오늘은 입맛이 안 땡기네.”
자포식 화법: “난 느끼한 게 정말 싫어! 이걸 어떻게 사람이 먹지.”

그러나 난 ‘자포식 화법’이 좋다. 지나친 겸손은 오만에 가까워지며 에둘러 말하는 방법은 화자의 진실성을 의심케 하는 고로.

a 길고 지루한 흥정. 결국은 모두의 승리로 끝난다. 류쟈샤 댐의 수면 위를 나는 쾌속정.

길고 지루한 흥정. 결국은 모두의 승리로 끝난다. 류쟈샤 댐의 수면 위를 나는 쾌속정. ⓒ 오창학

식당을 나서 차를 선착장 주차장에 대고 병령사까지의 배편을 알아봤다. 개인소유의 모터보트를 소유한 업자들이 각다귀처럼 달라붙는다. 길고 지루한 흥정의 시작. 선착장에서 병령사까지 유람선으로 편도 3시간, 자신의 쾌속정으로 1시간 30분이 걸린다며(실제로는 45분) 가격을 제시해 온다.

육로로 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 긴 자동차 여행에서, 더구나 온통 황무지와 사막지대를 관통하는 여정에서 물 위를 편안한 배편으로 이동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끝내 흥정에 매달리고 있다.

더 받고자 하는 자와 덜 주고자 하는 자의 줄다리기. 처음엔 금전을 아끼고자 시작한 ‘놀이’가 급기야는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가고 있다. 배 주인은 500위안을 고집하고 우린 300위안에 선을 그었다. 실은 여섯 사람이 배 한 척을 빌리는데 그 가격이면 적정가라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가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오기로 ‘차라리 안 타고 말어’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마음을 비우니 금방 길이 보인다.

9인승 쾌속정에 철봉씨까지 우리 7명을 태우고 갔다가 돌아올 때는 남은 두 좌석에 다른 손님을 합승시키는 조건으로 400위안에 합의를 봤다. 흥정이라는 게 어차피 이긴 자도 없고 진 자도 없는 게임 아닌가. 어쩌면 양자 모두가 이기는 게임일 수도 있고. 서로가 합당하다 생각되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흥정이니까.

쾌속정 주인 아저씨 나이 겨우 36세. 다들 까무라치는 줄 알았다 액면가는 영락없이 50대인데 30대라니. 우리식 나이를 감안한다 쳐도 나보다 겨우 2살이 많은 사내다.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었다. 또 한 번의 문화적 충격. 얼굴 나이와 실제 나이는 무관하다. 간쑤성 이후의 서쪽 사람들은.

쾌속정은 해발 1745m의 수면 위를 스치며 날아간다. 그야말로 물 찬 제비다. 주인은 길고 지루했던 흥정의 후휴증이 없는지 배를 지그재그로 몰며 재롱도 피운다. 좌우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가히 절경이다. 무더운 이 날씨에 제법 상쾌한 체험이다, 생각한 순간 기억을 잃었다.

운전에 대한 부담 없이 남이 끌어주는 교통수단 위에 오르니 긴장이 풀렸나 보다. 선창에 머리를 짓찧으며 넋을 잃고 졸다가 눈을 뜨니 탁 트인 전경에 잠이 확 깬다.

a 병령사(빙링쓰) 선착장 앞 전경. 졸다 깨어 보니 어느덧 선경이다.

병령사(빙링쓰) 선착장 앞 전경. 졸다 깨어 보니 어느덧 선경이다. ⓒ 오창학


류쟈샤 선착장을 떠난 지 45분. 드디어 병령사 선착장에 닿은 것이다. 류쟈샤 선착장의 선주들보다 더 집요한 장신구 판매상들이 먼저 맞는다. 그들 키 너머로 병령사 선착장의 풍광이 눈에 가득 찬다. 푸른 하늘을 괸 백옥루 남은 기둥들. 물을 건너 다다른 사원이어서일까 사바세계를 넘은 하나의 선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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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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