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83회

등록 2006.11.30 08:20수정 2006.11.3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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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무런 내색 없이 십칠 년을 지내온 인물이라면 정말 인내심이 극에 달한 자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무공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자신이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그 비급을 가져간 자는 내부인이 분명하고, 이번 사건의 흉수도 내부인이라고 보아야 하겠군요."


"그것이 더욱 노부를 당황하게 만드는 일이라네. 십칠 년 전에 본 보에 있었던 인물 중 아직까지 본 보에 남아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럴 만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네.”

보주야 그렇다 치고 친구들에게 마음의 빚을 진 철담으로서는 비급을 분실한 이후 십칠 년 동안 비급을 찾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혹시 철담이 죽은 것은 분실된 비급의 단서를 포착했고, 그것 때문에 살해당한 것은 아닐까?

구용의 무공비급이 운중보에 있었고, 그것을 분실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단서였다. 또 비록 보주가 십칠 년 전 운중보에 있었던 인물 중 짐작 가는 인물이 없다고는 했지만 흉수의 범위를 좁힐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풍철한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밖에서 모가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모가두입니다."

무슨 일일까? 손님을 맞이하고 있을 때에는 특별히 급한 일이 없으면 찾아오지 않는 것이 예의다. 허나 보주는 잠시 밖을 보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알았다."

보주는 모가두가 찾아온 것이 무슨 연유인지 아는 듯했다. 시선을 풍철한에게 돌렸다.


"아직 미진하기는 하지만…, 아니 언제든지 노부를 찾아올 수 있으니 이번은 끝내기로 하세. 노부는 손님을 맞이하러 나가야겠네."

"운중선이 도착한 모양이군요."

"이번 배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게야. 이미 죽어 시신이 된 친구와 이제 세 명이 되어버린 마지막 친구를 맞이해야겠네."

보주의 말에 풍철한은 이번 배에 누가 들어오는지 알게 되었다. 이미 살해된 혈간 옥청천의 시신과 중의(仲醫) 공손정(公孫靜)이 들어오는 것이다. 풍철한은 포권을 취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보주의 눈길이 설중행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능효봉으로 돌아갔고, 곧 풍철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설중행과 능효봉을 바라보던 그 눈길은 풍철한을 바라보는 눈길과 왠지 모르게 그 색깔이 다른 것 같았다.


45

"구룡이 살아있었다 해도 지금쯤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 나이야. 우리보다 최소 스무 살은 많았을 걸?"

목소리마저 인자한 할아버지의 나직한 것이었다. 아마 사람들은 이 시대 최고의 고수를 의미하는 동정오우 중 한 명인 성곤(聖棍) 담자기(譚紫麒)가 할 일이 없이 저잣거리에서 손자의 손을 잡고 배회하는 아주 평범한 노인과 아주 흡사한 모습이라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약간 가는 듯한 눈매와 휘어져 내린 매부리코의 콧날이 언뜻 날카롭게도 보일만 했지만 약간 두툼한 입술과 혈색이 좋은 둥근 얼굴은 그런 느낌을 지우기 충분했다. 더구나 보통사람보다 훨씬 큰 몸집에 어깨 쪽이 굽은 듯한 모습 역시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를 연상하게 했다.

"결국 사라진 구용의 무공비급이 이곳 운중보 내부자의 손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씀이시군요."

"누구의 손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어쩌면 진작 이 운중보 밖으로 유출되었을지도 모르고…. 아까도 말했듯이 구룡이나 그 후인들이 나타나 이런 일을 벌이고 있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네."

함곡은 성곤의 모습에서 비록 적이었지만 구룡을 인정하고 있음을 느꼈다. 구룡에 대해서는 함곡 역시 진정한 사내들이었고, 멋을 아는 영웅들이었다고 알고 있는 터여서 그에 대해서는 더 반문하지 않았다.

함곡은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비록 가사(袈裟)를 걸쳤다 하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중년여인이 있었다. 여승이라면 머리를 삭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녀는 탐스런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둥글게 말아 올린 모습이었다.

아미의 회운사태(回雲師太)였다. 이미 나이가 사십 중반을 넘어섰음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살 전혀 없어 삼십대 초반의 나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였다. 마침 회운사태가 성곤과 만나고 있는 사이에 찾아오게 되어 함곡으로서는 백양각까지 내려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게 된 터였다.

"사태께서는 그날 매송헌에 얼마나 계셨습니까?"

"그리 오래 있지 않았지요. 일각 정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철담어른과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은 말이었다. 철담이 시해되기 직전에 만난 사람이니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었지만 좀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았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소. 본파에서는 이번 운중보에 데리고 온 두 아이를 맡길까 특별히 부탁을 했고, 철담께서 저번 선발에 본파의 인원이 없었으니만큼 받아들이겠다고 확답을 주시기 위해 부른 것이지요."

짧은 시각이어서 차를 대접하지 않았던 것일까? 함곡은 지나가는 투로 슬쩍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철담어른은 철관음(鐵觀音)을 유독 좋아하셨다는데 그날 매송헌에서 차를 드신 적이 있습니까?"

회운사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분명 사건 현장에서 보면 그녀가 차를 마시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차를 마시지 않았느냐는 함곡의 질문에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고, 회운사태 역시 그 질문의 의도가 무언지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철담께서는 누구에게나 차를 대접하길 즐기시지요. 하지만 그날은 심기가 불편하셨던지 말씀도 적었고 대답을 들었으면 빨리 가주었으면 하는 기색이었지요. 그래서 차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하고 물러 나왔다오."

함곡이 시선을 돌렸다. 허나 돌리는 시선에는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눈빛이 반짝였다.

'사태를 만나기 전 무슨 일인가 있었다는 뜻이로군. 그렇다면 그 전에 들른 보주와 말다툼이라도 했을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내심을 감추며 성곤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보신 분이 어르신이시니…, 혹여 철담어른께 이상한 기미라도 느끼셨습니까?"

"이상한 기미라…?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뭔가 서두르는 듯한 느낌은 받았지. 하지만 평상시와 그리 특별하게 다른 것은 아니었네. 본래 철담의 성격이 급해 사소한 일이 신경을 거슬려도 금시 반응을 하곤 했지."

기대를 가지고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싱거웠다. 또 이러한 반응은 의외라고 할만 했다. 사실 사람들은 누가 죽었다던가 하면 없던 사실도 들추어내어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자살을 했다든가 타살을 당한 경우에는 의례 '맞아. 뭔가 이상했어'라든지 하다못해 최소한 '왠지 모르지만 그의 얼굴에 암울한 그림자가 덮여 있었어' 정도는 말하게 되는 것이다.

"성곤어르신께서는 차를 드셨습니까?"

그 물음에 성곤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차에 무슨 단서라도 있다는 것인가? 자네는 차를 마셨는지 여부에 대해 무척 집착하고 있구먼. 하여튼 노부 역시 차를 마시지 않고 나왔네."

질문을 한 함곡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사실 차에 어떠한 단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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