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82회

등록 2006.11.29 08:21수정 2006.11.2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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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구룡은 두 명이 죽었고 일곱이 남은 상태에서 우리와 마주쳤네. 그 중 세 명도 온전한 몸이 아니었지. 이미 중원의 대세는 동정오우 쪽으로 기울었고 그들은 마치 한왕(漢王)에 쫓긴 항우(項羽)와 같은 신세였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가 유방(劉邦)에 쫓기다 해하(垓下)에서 포위된 후 자결한 고사(古事)로 비유한 것은 아주 적절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구룡은 강했으나 그들의 운은 지속하지 못했다. 아니 동정오우라는 불운으로 인해 그들의 천하는 지속하지 못했다.


"허나 노부는 그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구룡을 진정으로 존경할만한 인물들이라 생각하고 있다네. 그들은 진정한 사내들이었고, 그 당시 유일한 영웅이었지."

적을 인정하는 일은 어렵다. 더구나 자신이 꺾은 상대에 대해 지금까지 존경할만한 인물들이었다고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더욱 놀랄만한 일이다.

"노부는 그들이 무림에서 떠나주기를 바랬을 뿐 그들을 죽이는 것까지 원치는 않았네. 그들같이 사내다운 사내들이 죽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지."

풍철한은 보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주의 진심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보주는 진심인 것 같았다. 이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가족을 그들에게 잃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하지 말아야 할 말이었다. 보주에게 있어 가장 큰 상처가 바로 그 사건일진대 아무리 사건을 조사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해도 아직 이 사건과의 연관성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처를 끄집어냈다는 것은 자기 멋대로 살아온 풍철한의 기질 탓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번쩍-----!


아니나 다를까? 풍철한은 보고 있던 보주의 눈에서 일순 섬광이 쏘아 나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섬광은 마치 비수처럼 가슴을 비집고 파고들었는데 반드시 그 무서운 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섬광이 뿜어져 나온 후에 보인 심연과도 같은 암울함과 텅 빈 듯한 슬픔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수했다.'

풍철한은 후회했다. 아무리 구룡이 존경할만한 인물들이었다고는 하나 처자식을 죽인 자들인데 그들을 아직까지 존경한다고, 그리고 그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는 말에 불쑥 튀어나오는 말을 참지 못한 것은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 그는 뭐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얘기는 안들은 것으로 하겠네."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느새 평상시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보주의 말이 풍철한의 곤경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풍철한은 내심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아픔을 건드렸다는 미안한 마음이 부담되었다.

"노부는 구룡에게 생사혈투가 아닌 무인으로서 진정한 승부를 가르자고 제의했네. 그때까지 노부를 비롯한 동정오우는 구룡과의 정면 승부를 피해왔던 터라 우리 역시 마음속으로는 한 번쯤 정면으로 승부를 가르고 싶었지."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가슴의 상처를 헤집어 놓아서인가? 느긋하게 말을 해주려던 태도에서 말이 간결하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피해다닌 동정오우의 제안이 구룡에게는 의외였겠지. 그들은 흔쾌히 승낙했고 거기에 한 술 더 떠 내기를 제의해 왔다네."

"어떤…?"

더는 묻지 않겠다고 내심 작정해 놓고도 풍철한의 입에서는 불쑥 말이 나갔다. 태생이 본래 그렇고 천성인 것을 어찌하랴?

"승부를 겨룸에 있어 생사는 문제로 삼지 않고 패하는 쪽이 영원히 무림을 떠나자는 것이었다네. 또 차후 상대에게 영원히 복수도 하지 않고 이를 위해 패자는 자신들의 독문무공비급을 내놓기로 하였지.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되고 패자는 영원히 이 지상에서 사라지자는 말이었네."

무림인들 간의 승부에서 무공비급까지 내놓는다는 것은 목숨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막대한 타격을 입는 일이다. 아예 후사를 도모하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복수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대한 증거였다. 결정적으로 대(代)가 끊김을 의미했고, 자신의 무공이 후에 어떠한 악행(惡行)에 사용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명예에 치욕을 가져온다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목숨보다 더욱 중한 일인 것이다.

허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근원을 알 수 없었던 동정오우의 무공. 구룡은 동정오우의 내력을 캐기 위해 그토록 면밀히 조사했지만 알 수 없었던 그들의 무공내력에 대해 알고 싶어했음이 틀림없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그들은 결국 약속을 어겼군요."

또다시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보주의 얼굴에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분명 답을 가르쳐주었는데도 풍철한은 또다시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다. 보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좀 더 차근차근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구룡은 약속을 어길 인물들이 아니네. 만약 우리 동정오우가 패했다면 약속을 어겼을지도 모르지. 동정호 군산에서 노부에게 반 초식을 패한 천룡(天龍)이 자진했네. 자진하기 전 그는 자신에게 맹세했고 남은 구룡의 형제들에게 반드시 약속을 지키라고 부탁했지. 남은 여섯 명의 인물들 역시 스스로 무공을 폐지하고 그곳을 떠났네."

천룡은 구룡 중 맏이로 절대무적의 인물이었다. 젊어서 철담 하후진이 당한 단 한 번의 패배는 천룡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천룡은 철담 하후진을 죽이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동정오우가 구룡과 천하를 놓고 쟁패하기 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재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급은?"

"우리 다섯은 그 무공비급을 같이 보았고 연구했지. 그리고 친구들은 그 비급을 본 보에서 보관하기를 바랐다네. 그 뒤 구룡의 독문비기가 실린 아홉 권의 무공비급은 노부가 보관하고 있었네."

'있네'가 아닌 '있었네'라는 말은 그 무공비급이 지금 보주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말이다.

'꿀꺽----!'

풍철한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노부는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그 비급을 철담에게 맡겼네. 사실 누가 가지고 있어도 마찬가지였고, 우리 다섯이 모일 수 있는 본 보 안에만 있으면 문제가 없었지. 헌데 십칠 년 전 철담에게 그것을 분실했다는 말을 들었네."

세상에 어찌 그것을 분실할 수 있단 말인가? 한 권만 무림에 흘러나가도 엄청난 평지풍파를 일으킬 구룡의 비급이다. 무림인이라면 목숨을 도외시하고 차지하려 할 무가지보(無價之寶)다. 새는 모이 때문에 죽고 사람은 보물 때문에 화를 입는다고 했다. 만약 분실된 구룡의 비급이 중원으로 빠져나갔다면 시산혈해의 참극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구룡의 비급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다.

"당시 분실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은밀하게 조사했지만 찾을 수 없었네. 철담은 그것을 분실했다는 이유로 나머지 친구들에게 언제나 빚을 졌다고 생각했지. 그 후에도 계속 단서를 찾아왔지만 지금까지 전혀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네."

"비급을 가져간 인물은 정말 참을성이 깊은 자가 분명하군요."

"노부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네."

비급을 가져간 자는 분명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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