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81회

등록 2006.11.28 08:13수정 2006.11.28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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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슬(于瑟). 그 이름을 듣자 설중행은 눈이 크고 예쁜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우연하게 몇 번 본적이 있었지만 말 한마디 나눈 적도 없었다. 자신보다 한두 살 어린 것 같았지만 왠지 말붙이기 어려운 아이였다. 아니 보주의 딸이라는 사실이 더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아마 지금은 아주 성숙한 처녀로 자라있을 것이다.

풍철한과 함곡은 좌등이 우슬이란 여인을 말할 때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보이자 조사하기 꽤 까다로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주의 딸이라는 우슬이란 여인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런 경우 조사는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우선 좌선배께서 천리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젯밤 술시에서 자시까지의 행적을 은밀히 조사해 주시겠소? 미환검이나 봉황검, 그리고 우슬이란 여인은 아마 시비들이나 그 시각에 경비를 섰던 호위 무사를 통하면 될 것 같으니 말이오. 운향이란 시비와 유하란 찬모 역시 같은 방을 쓰거나 동료에게 물어보면 대충 나올 것 같소만…."

직접 자신들이 물어보거나 조사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터였다. 중간에 좌등이 조사한 내용을 자신들에게 속이거나 대충 조사하지 않는 한 말이다. 함곡의 부탁에 좌등은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소. 그건 그렇고 조반을 안 드시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무슨 말씀이오? 좌선배. 그렇지 않아도 허기가 져 짜증만 나고 있소."

누가 먹지 말라고 해나? 간식꺼리도 마다하고 안 먹겠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 덕에 굶기는 좌등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좌등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듯 표정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상대인이 이곳 일행 분들에게 오찬을 같이하자고 전갈이 왔소. 필히 여덟 분 모두 참석해 달라고 말이오."

그 말에 좌중의 시선은 모두 선화에게 쏠렸다. 조금 전 선화가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대접한다는 말은 일단 적의가 없음을 내비치는 태도다. 더구나 자신들에게 직접 사람을 보내지 않고 운중보를 통해 전해온 것은 어쨌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의미가 있었다.


좌중의 시선이 선화에게 쏠린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좌등뿐이었다. 그 역시 무슨 영문인지 몰라 선화를 바라보자 시선이 쏠린 것이 부담스러운지 좌등에게 물었다.

"여덟 사람이라니요? 보다시피 여기 일행이라 보았자 여섯뿐이 더 있나요?"

"반 시진 후면 아마 운중선이 도착할 것이요. 그 시각에 풍대협의 동생인 혈녹접(血綠蝶)이 들어오기로 되어있지 않소?"

그 사실까지 상만천이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상만천은 대상인이오, 부호 정도가 아니라 한 분야에서 전 중원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인물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본인까지 포함시켜서 모두 여덟이라고 한 것이오."

이미 상만천은 자신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풍철한은 왠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다 답답한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찬에 늦지 않으려면 빨리 움직여야겠군. 자네와 나는 공평하게 각기 세 군데만 들르면 되겠지?"

함곡이 만나기로 한 상만천은 어차피 같이 만나야 할 터였다.


44

쏴아아----

장대비가 마치 물동이를 퍼다 붓듯 쏟아지고 있었다. 우장을 걸쳤다 하나 속까지 젖은 지 오래였다.

"자네는 마치 노부와 싸우러 온 듯한 모습이군."

풍철한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들이닥치자 운중보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풍철한은 운중보주의 눈길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구룡의 무공이 연이어 나타나는 것에 뭔 연유가 있는 겁니까? 분명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귀산노인이나 좌선배에게 아무리 다그쳐도 대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니 말입니다."

뭐 슬쩍 떠볼 생각도 없었다. 시간을 끌 생각도 없었다. 운중보주에게 인사를 마치고는 곧바로 던진 질문이 이것이었다. 운중보주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미 풍철한이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그런 질문이 나올지 알았다는 태도였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야 소생이 알 수 있겠습…."

"뭐든지 거저 알려고 하지 말고 생각해 보게. 충분히 생각한 후에 듣는 대답은 아무런 생각 없이 듣는 대답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네. 물론 자네가 생각 없이 묻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다만 자네가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게 더 궁금하군."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운중보주는 지금 운중보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하여 뭔가 감을 잡고 있을 것이다. 다만 보주는 철담의 사인에서 보듯 이 사건들을 밝혀내는데 제약이 있을 것이고 풍철한과 함곡이 그것을 대신해 주길 바랄 것이다. 은근히 단서를 흘려주면서 말이다.

풍철한은 갑자기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불안감에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과 함곡은 마치 누군가의 손에 올려진 인형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아니,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운중보주가 실을 움직이면 그대로 따라 움직여야 하는 꼭두각시 인형.

"그렇다고 기분 나빠하지는 말게. 노부는 자네와 함곡 손에 달렸네. 자네들이 이 사건을 명쾌히 해결해 주어야 노부가 홀가분해지지 않겠는가?"

이미 풍철한의 마음을 환히 읽고 있었다. 늙은 생강이 맵다고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풍철한에게 사건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라고 채찍질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차피 운중보주의 손에 벗어나지 못함을 경고하는 것일까? 풍철한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여전히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입니다. 맨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구룡이나 구룡의 후인이 이곳 운중보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가능성은?"

"어쩌면 구룡의 무공비급이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다고 보아야겠지요. 지금 이 운중보에 흐르는 이상기류를 만들어내는 누군가의 손에 말입니다."

운중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정답을 맞혔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어느 쪽일 것이라 생각하는가?"

"이미 답은 가르쳐주시고 뭘 또 물으십니까?"

"나이가 들다 보면 이렇게 뻔한 대화도 즐거울 때가 있다네. 물론 노부 역시 젊어서는 너무나 지루하고 같잖은 생각이 들었지."

하여간 나이가 들어갈수록 잔소리가 같은 것이 많아진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미 보주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려는 기미를 보였다. 허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아무리 장광설을 늘어놓아 지루하더라도 더 자세히 들을 필요가 있는 이야기였다.

풍철한은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찻잔 세 개를 집어들고는 자신과 설중행, 그리고 능효봉의 앞에 놓았다. 눈치 빠른 능효봉이 보주 앞에 놓인 아직 반쯤 남아있는 찻잔에 차를 따르고는 세 개의 잔에 차를 따랐다. 풍철한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보주를 바라보았다. 이제 아무리 지루하더라도 충분히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태도였다.

"말을 하자면 제법 긴 이야기가 되겠구먼."

보주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비가 쏟아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차를 음미하듯, 아니면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던 보주의 입이 열렸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이십육 년 전 벌어졌던 군산혈전(群山血戰)을 말하지 않을 수 없네."

군산혈전. 동정호 군산에서 벌어진 구룡과 동정오우의 마지막 혈전으로 무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다. 무림 역사 천여 년을 두고 부침은 있었지만 중원무림의 대들보로 존재했던 구파일방이 철저히 짓밟히고 전통무림세가들 역시 문을 닫아걸게 하였던 구룡의 역사를 종식시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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