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의 최첨단 변화구 '마구 메이저리그 볼'

<거인의 별>과 <내일의 죠>로 짚어본 '열혈'

등록 2006.12.03 19:56수정 2006.12.04 09:06
0
원고료로 응원
당신의 추억 속에 남아있는 스포츠 만화와 그 주인공은 누구일까? 무시무시한 강속구를 던지는 설까치? 아니면 '더스트볼'을 던지던 독고탁? 스포츠 만화는 흔한 구조와 뻔한 내용임에도 늘 사랑받는다. 스포츠에 대한 짜릿하고 스릴넘치는 묘사도 매력적이지만,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정상에 서는 한 인간의 이야기에 시대가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고난과 역경의 시대'를 지나면서, 스포츠 만화의 유형도 꽤 달라졌다. <테니스의 왕자>나 <슬램덩크>의 '서태웅'처럼 냉소적인 천재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폭렬갑자원>이나 <원아웃>처럼 기존의 스포츠 만화에 대한 패러디나 안티테제를 표방하는 만화들도 있다. 기존의 스포츠 만화는 흔히 '열혈'의 성향을 띄게 마련인데,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한 시대의 '열혈'은 '피곤한 촌스러움'으로 인식된다. 특히 <터치>처럼 야구만화에서 소녀 취향의 로맨스를 추구해 큰 화제가 됐던 경우도 있다.

사무라이들이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몇백년 넘게 지배해왔던 일본이다. 늘 비장하게 각오를 곱씹는 그들에 대해 질릴대로 질렸을 것이다. 스포츠 만화는 그 변화 속의 달라진 시선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비장함의 화신이라는 '신선조 무사'들조차도 소녀만화의 동성애 코드로 그려지는 경우가 있으니, 더이상의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

시대를 풍미한 '마구 메이저리그 볼' 시리즈

a

근육 강화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쉽게 못볼 깁스다. '거인의 별'은 저 깁스를 말한다. ⓒ 요미우리TV

스포츠 만화 <거인의 별>과 <내일의 죠>는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보고 자란 일본 젊은이들에게, 그의 만화에는 없던 '열혈'의 맛을 톡톡히 보여준 작품들이다. <거인의 별>의 주인공 '호시 휴마'는 매일같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팔이 부서지도록 공을 던졌으며, 미친듯한 근성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미친듯한 근성은 주제곡에까지 반영된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시련의 길을 가는 것이 남자의 근성"이라고 외치며, "피눈물이 흘러도 닦지 말고 끝까지 가라"고 외치는 만화가 바로 <거인의 별>이다. 지금 시대의 관점으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촌스러운 한 마디로 보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거인의 별>에서는 특히나 '아버지'와의 관계가 의미심장하다. 잘 나가는 야구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좌절된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그 꿈을 이루려고 한다. 매일같이 밥상을 뒤엎고 아들의 뺨을 때렸으며, 상상도 못할 지옥훈련을 맛보인다. 그뿐인가? 상대팀의 코치 노릇까지 하며 아들의 약점을 물고 늘어질 정도다.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 세대'는 꿈을 잃었지만, 그 꿈에 대한 집착은 남아있다. 그 집착은 고도성장기를 보내고 있는 아들에게로 가학적으로 표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호시 휴마'는 그 피눈물나는 훈련의 결과로 일종의 마구를 만들어낸다. 일명 '마구 메이저리그 볼' 시리즈라고도 한다. 이중에는 '호시 휴마'가 다리를 들어올리면서 흙을 발로 차 엄청난 흙먼지를 유도해 순간적으로 타자의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는 치밀한 과학적 계산(?)까지 반영된 '마구'도 있다.

그렇듯 오직 근성으로 승부하고, 피나는 훈련으로 승부했던 '호시 휴마',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불까지 번쩍이면서 마구를 던졌다. 그 마구는 일본의 어린이들에게 고스란히 꿈으로 녹아들었고, 일본야구의 전통적인 인기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들어는 봤나? 캐릭터 장례식

a

<내일의 죠>의 '하얀 재' 장면.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장면이다. ⓒ 서울문화사

'마구 메이저리그 볼' 시리즈 등, 현실을 벗어난 설정을 선택한 <거인의 별>은 다소 어린 독자들의 인기를 얻었고, 그런 설정은 훗날 <피구왕 통키> 등의 다른 스포츠 분야를 그린 만화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에 반해 <내일의 죠>는 황당한 만화가 아니다. 오히려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거인의 별>이 '판타지'를 통해 꿈과 희망을 줬다면, <내일의 죠>는 현실적인 비장미로 일본의 젊은이들을 울렸다.

<내일의 죠>의 이야기도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대단히 상투적이다. 주인공 '야부기 죠'는 '야생마'의 삶을 살고 있던 천애고아였으며, 권투선수를 길러내는 '단페이'와 소년원에서 라이벌 '리키시'를 만나 권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흥미는 곧 '투지'로 연결된다.

<내일의 죠>는 초반부에서 '리키시'를 집중적으로 주목한다. 그는 '죠'를 이기기 위해 페더급에서 밴텀급으로 감량하면서 피눈물나는 인내력을 과시했으며, '죠'와의 대결에서는 '승리 후 사망'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내일의 죠>의 팬들은 그 결과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리키시'를 위해 캐릭터 장례식까지 벌인다. 1970년 3월 당시에 출판사인 고단샤 건물의 강당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전국에서 모인 수백명의 팬들이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부르고 , '리키시'의 영정 사진을 앞세우며 실제의 장례식처럼 엄숙하게 치룬 것이다.

만화에서는 리키시의 죽음이 '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으로 권투를 할 수 없게 된 '죠'는 기구한 길을 걸은 끝에 다시 링으로 복귀해 '호세 멘도자'와 대결을 벌이면서 역사에 남을 명장면을 연출했다. 앉은 자리에서 '하얀 재'가 돼 편안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이 '하얀 재'는 '죠의 죽음'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그 편안한 미소로 인해 '결코 죽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한 사람도 많았다. 작화를 맡은 치바 데쓰야는 죽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그리고 '내일을 위해 웃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 모두를 고려한 것이다.

열혈, 시대를 말하다

특히나 <내일의 죠>는 적군파 계열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하네다 공항에서 항공기를 납치해 북한 입국을 시도하며 일본 최초의 비행기 납치사건을 벌인 그들은, 선언문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어떠한 투쟁 앞에서도 오늘처럼 자신과 용기와 확신이 충만한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자. 우리들은 '아시다노 죠'다."

<내일의 죠>가 해석과 관점에 따라, '투쟁'을 위한 교과서로도 받아들여졌음을 말해주는 에피소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열혈 스포츠 만화'는 이미 그 시대적 사명을 다 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스타일을 표방한 만화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 '새로운 스타일'은 결국 우리 시대의 현실이다. '열혈'은 의미를 잃었고, 그 반대의 쿨한 이미지의 연예인과 캐릭터들이 인기를 얻고 있으며, 일부 마니아들에게는 '열혈에 대한 패러디'가 하나의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 나카지마 노리히로의 <아스트로 구단>나, 오와다 히데키의 <폭렬갑자원>이 대표적이다.

물론 '열혈'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다. '열혈'은 모험을 즐기는 소년 만화의 틀에 살아있으며, 애니메이션 <자이언트 로보>는 극단적으로 열혈을 추구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의학만화 <헬로우 블랙잭>은 열혈을 감각적으로 소화한 작품이기도 하다.

'열혈'은 남성들의 로망이다. 남성들에게는 한번쯤 피가 펄펄 끓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며, 목숨을 걸고 투지를 불태우고 싶어하는 속내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동경하는 면도 있다. '열혈'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는 남성들의 그런 본능적인 내면의 영향일 것이다.

결국 '열혈'과 그에 대한 '반발'이 동시에 유행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감성이 더욱 폭넓어졌고, 그것을 끄집어내는 만화작가들의 시선도 비례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화는 그렇게 '시대와 독자들의 내면을 보여주는 거울'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한겨레신문>의 제 블로그에도 올린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한겨레신문>의 제 블로그에도 올린 글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개의 눈을 가진 모래 속 은둔자', 낙동강서 대거 출몰
  2. 2 국가 수도 옮기고 1300명 이주... 이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3. 3 딸이 바꿔 놓은 우리 가족의 운명... 이보다 좋을 수 없다
  4. 4 '100개 눈 은둔자' 표범장지뱀, 사는 곳에서 쫓겨난다
  5. 5 전화, 지시, 위증, 그리고 진급... 해병 죽음에 엘리트 장군이 한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