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85회

등록 2006.12.04 08:18수정 2006.12.04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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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운중보는 동정오우의 것이었다. 비록 보주를 나군백이 맡고 있다고는 하나 운중보를 나군백 혼자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었고, 보주 역시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만약 철기문 안이었다면 자신의 말이 당연시되었겠지만 적어도 이 운중보 내에서는 철기문의 문주 옥청문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감히 천비가 주제넘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단혁은 황급히 허리를 꺾으며 양 손을 앞으로 모았다. 운중보주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비라 생각하는 분을 잃은 자네의 슬픔이야 어찌 정도를 따질 수 있겠나? 자네의 심정은 이해하네. 자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곧 운중보의 일이네."

말은 부드럽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하고 있지만 옥청천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은 운중보의 소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사사로이 사건에 개입할 수 없고 보주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함을 의미했다.

보주는 뒤를 돌아보며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옥기룡과 신기수사 옥청량을 바라보았다.

"너는 단각주와 함께 백부를 백호각으로 모시거라. 보 내의 사람들 모두에게 보상(報喪)을 하고 네가 상주(喪主)가 되어 분향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거라. 이미 외부에도 알려졌을 터인즉 고인을 기리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마다하지 말고…."


"사부님…! 그건…."

보주의 회갑을 위해 준비해온 운중보다. 이제 나흘 후면 회갑연이 열릴 터인데 사부의 말은 운중보를 상가(喪家)로 만들라는 말이 아닌가? 보주의 회갑을 축하해주기 위해 온 손님들에게도 예의가 아니다. 아예 회갑연을 포기한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후계구도에 영향력을 주기 위하여 시신을 운중보로 모셔왔지만 보주가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일지는 신기수사 옥청량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파문은 크겠지만 이미 온 손님들을 생각하면 적당한 선에서 처리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자인에게도 일러라. 매송헌에도 똑같이 준비하라고…, 가는 친구들의 마지막을 내 욕심 때문에 쓸쓸히 보낼 수 없다. 철담, 그 친구… 죽은 후에도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

흉수를 캐내기 위해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온 것을 지적한 말이었다. 이미 이승을 떠난 망자(亡者)에게 감정이 남아있을 리 없지만 그대로 두는 것 역시 망자에 대한 살아있는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다. 운중보주의 단호한 태도에 옥기룡은 더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성곤어른의 표정으로 보아 이미 두 분은 이 일에 대해 상의를 마친 것 같았다.

"먼저 올라가 준비하거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대답과 함께 관 뚜껑이 닫히자 단혁 일행이 빠르게 옆으로 비켜났다. 옥청량과 함께 깊이 포권을 취하고는 옥기룡은 조심스럽게 백팔제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자 운중선에서는 황색도복을 입은 인물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정말로 자하진인(紫霞眞人)이 직접 왔군."

면철비 앞에서 운중선에서 내리는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던 풍철한이 다소 경탄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좌중의 시선은 운중선에서 내리는 맨 앞의 노인에게로 쏠려있었다. 노인의 모습은 의외로 볼품이 없었다. 아무리 쇠락하였다고는 하나 육파일방의 장문인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더구나 현 중원 무림에서 욱일승천의 기세로 언제나 태산북두로 일컬어지던 소림과 무당을 제치고 정파 최고의 문파로 공공연히 인정받고 있는 화산파(華山波)의 장문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값비싸 보이기는 하지만 헐렁한 황색 도복을 걸쳐 더욱 왜소한 느낌이 들게 하는 체구와 이마가 좁고, 작은 눈에 턱마저 약간 주걱턱이어서 전형적인 원숭이상의 인물이었다. 더구나 약간 구부정한 등과 깊고 가는 주름이 얼굴에 세월의 흔적을 남기고 있어 더욱 원숭이처럼 보이게 했다.

아마 젊었을 적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모 때문에 많은 놀림을 받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정성들여 빚은 듯한 백발과 잘 다듬은 수염이 강팍한 그의 외모를 어느 정도 완화해 주는 듯했다.

오히려 자하진인의 뒤를 따르고 있는 다섯 명의 인물들은 모두 일견하기에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기도가 풍기고 있었다. 한결같이 사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확실히 안정감이 있고 묵직했다. 한결같이 검에는 다섯 개의 매화수실이 달려있어 화산 최고의 검수임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화산칠검(華山七劍) 중 네 명이라…? 게다가 과거 화산의 꽃이라 일컬어지던 매봉검(梅峯劍) 황용(黃蓉)까지 데리고 왔군."

함곡이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중년인들 사이로 유독 눈길을 끄는 중년여인이 있었다. 전대 장문인의 딸로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미색이 대단해 젊었을 적 여기저기서 주목을 받은 여인이었다. 그로 인해 자파는 물론 다른 문파 청년영웅들의 수없는 구애에 시달린 끝에 일체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고 삼년간 폐관수련까지 했다는 여걸이 그녀였다.

여하튼 어쩐 연유인지 지금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여인이 바로 매봉검 황용이었다. 그녀가 왜 뭇 젊은 영웅들의 구애를 마다했는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 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돌았지만 거의 봉문하다시피 외부와의 접촉을 줄이고 있던 화산파의 일이라 더 자세한 내막이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녀 역시 가끔 나서던 중원행마저 폐관수련이 후 중단되어 버리자 호사가들의 궁금증은 언제나 그랬듯이 시간이 흐르면서 수그러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화산파에서 이번 일에 정말 작정하고 나선 것 같군."

풍철한이 말과 함께 함곡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함곡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자하진인이 직접 나선 것만으로도 이번 운중보 후계자 문제에 얼마나 전력을 쏟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산의 대들보라는 화산칠검 중 네 명이라니….

"보주는 자하진인과 이미 안면이 있었던 모양이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노인네들이야 뻔하지 않은가? 한마디면 될 것을 열 마디 이상으로 늘이지 않나?"

건성으로 대답하며 풍철한의 시선은 자꾸 운중선 쪽을 향했다. 아래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과장되게 위에서도 들리는 웃음소리였는데, 자하진인의 웃음소리였다. 그것을 끝으로 운중보주와 화산파 일행은 함께 백팔제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운중보주와 성곤 담자기가 직접 마중해야 할 인물들은 그 정도였던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지금까지 운중선에서 내리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던 사람들의 시선은 지금 막 운중선의 갑판에서 부두로 내려서는 한 여인에게로 하나 둘 쏠리기 시작했다. 이미 중요 인물들은 모두 내리고 운중보주마저 자리를 뜬 후에 좌중의 시선이 지금 운중선에서 내리는 여인에게로 쏠린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여인의 지독한 염태(艶態)였다. 윤기가 흐르는 것이 고급 명주로 만든 옷으로 보였는데 오석(烏石)과 같이 까만색인데다가 몸에 감기는 듯 착 달라붙은 화복이어서 마치 나신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선연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풍만한 가슴의 굴곡 위에는 마치 바로 활짝 핀 꽃가지를 얹어 놓은 듯 붉디붉은 꽃송이와 바람이 불면 하늘거릴 것 같은 나뭇잎이 수놓아져 있었고, 노란색의 나비 몇 마리가 꽃 주위를 나는 모습까지도 수놓아져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걸음걸이마저 물씬 색기를 풍기고 있어 사내라면 시선을 뗄 수 없었고, 주위를 의식하지 아니하고 와락 안고 싶은 충동마저도 일 정도였다.

"요사한 계집…!"

호기심이 어린 다른 이들의 시선과는 달리 그 흑의화복의 여인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선화의 입에서 냉기가 흐르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힐끗 선화의 눈치를 살피던 풍철한이 결국 선화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자신의 형제를 욕한다 해서 선화를 탓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오해였지만 지금도 그 오해를 풀지 못한 풍철한으로서는 변명할 처지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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